[3040칼럼] 노란봉투법, 더 미룰 일 아니다

  •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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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04   |  발행일 2022-10-04 제26면   |  수정 2022-10-04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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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도시 간 장거리를 이동하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와 마주친다. 그레이하운드는 미국 각지에 버스터미널도 운영했는데 그 유지관리 업무는 용역회사가 대행했다. 1964년 7월 용역회사 플로어스의 노조가 그레이하운드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노조의 요구는 거부됐다. 그러나 같은 해 연방대법원은 사용사업주(직접 고용하지 않은 파견노동자를 사용하는 자)가 노동과정을 통제할 수 있으면 노동계약의 당사자가 아니어도 '공동사용자'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이듬해 연방노동위원회는 그레이하운드 사측의 교섭 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결정했다. 사용자 범위의 확장에 기초한 '공동사용자 원리'는 그렇게 미국에서 하도급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보호하는 규범의 뿌리가 되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대개 원도급 사업자들은 위장도급과 불법파견으로 원가 절감과 유연성 확보에 열을 올리면서 하도급 노동자들에 대한 사용자 책임만큼은 회피해왔다. 지난여름 대우조선 하도급노조 파업에서 노동자 유최안이 0.3평의 철창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채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는 물음을 던진 것도 그런 현실 때문이었다. 노조로서는 도급계약을 통해 하도급 노동자들 임금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진짜 사장인 원도급 사업자 대우조선과 교섭을 못 하면 삭감된 임금을 회복할 길이 없었다. 하도급노조가 조선소를 점거한 것도 그곳이 그들의 직장이기에 헌법 33조가 보장한다던 단체행동권의 정당한 행사가 아닐 이유란 없었다.

그런데 대법원 판례를 보면 현행법상 원도급 사업자의 단체교섭 상대가 아닌 하도급노조가 원도급 사업자의 사업장에서 파업을 벌이면 정당하지 않은 쟁의행위로 불법이 되기 쉽다. 일각에서 대우조선 하도급노조 투쟁을, 제3자가 남의 사업장에 침입해 무단으로 영업을 방해한 것인 양 매도했던 배경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대우조선 사측은 하도급노조 조합원들한테 천년을 살아도 못 갚을 470억원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했다. 노조를 짓밟으려는 뻔한 의도인데 그 얼마나 폭력적이고 또 얼마나 위헌적인가. 한번 따져보자. 그렇다면 하도급 노동자들은 도대체 누구랑 교섭해야 노동조건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단체행동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불법이 안 될 수 있는가. 헌법상 기본권을 법원이 이렇게 제한해도 되는가.

지난 정부에서 이미 했어야 하는 일이지만, 이제라도 정의당과 민주당이 노란봉투법 입법에 나선다니 다행이다. 우리가 갈 길은 분명하다. 그것은 하도급 노동자들이 손배 가압류 걱정 없이 원도급 사업자와 직접 교섭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하도급 노동자들도 온전하게 노동3권을 누릴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이다. 단 그렇게 하려면 고루한 법원 판례의 제한을 넘어서기 위해 노동조합법을 차제에 대폭 개정해야 한다.

우선 동법 2조의 사용자 범위를 노동조건 등에 관해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는 자가 포함되도록 확대해 원도급 사용자가 교섭을 거부할 수 없게 해야 한다. 동법 2조의 노동쟁의 정의도 개정해 정당성이 인정되는 쟁의행위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동법 3조는 노조의 쟁의행위가 폭력이나 파괴를 주되게 동반하지 않는다면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도록 면책 범위를 넓혀야 한다. 동법 4조도 노무제공 거부 형태의 쟁의행위에 대해 형사책임 적용을 금지하도록 바꿔야 한다. 아울러 동법 29조의2 제1항은 적어도 초기업 노조에 대해서는 교섭창구 단일화가 적용되지 않도록 고쳐야 한다. 이 중 어떤 것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노란봉투법, 더 미룰 일 아니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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