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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설치 후 특별한 피해가 없는 사고본으로 국역화 작업에 동원됐고 지금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지금은 전해오지 않지만 고려 왕조도 실록을 만들었다. 정인지와 김종서는 세종의 왕명으로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충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했고 서문에 이렇게 썼다. '도낏자루를 새로 만들 때는 헌 도낏자루를 본받으며, 뒤에 가는 수레는 앞에 가는 수레를 거울삼아 조심하니, 무릇 전 왕조의 흥망성쇠는 진실로 장래의 감계(鑑戒)로 삼아야 하기에 한 편의 사서를 엮어 올립니다.'
이렇듯 조선왕조는 고려실록으로 고려사를 엮어 거울로 삼고 후대에 경계하기 위하여 실록을 만들었다. 패륜을 저지른 군주에게는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 했다. 연산군·광해군일기이다, 고종·순종실록은 일제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져 내용이 왜곡됐으므로 왕조실록에서 제외됐고, 장구한 역사와 진실한 기록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조선왕조실록
25대 국왕 치적, 472년의 역사 담아
모든 분야 진실성…가치 매우 높아
나라 다스림, 하늘 뜻 나타나는 것
일·월식, 별의 특이현상 많이 담아
왕에게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 '사관'
왕이 두려운 것은 큰 하늘과 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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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중 광해군일기, 광해군은 패륜을 저질렀기에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 했다. 사후에 편수관이 일기라 명명했으므로 본인은 알지 못했다. 〈문화재청 제공〉 |
◆고려실록
고려왕조가 만든 최초 실록은 태조부터 7대 목종(918년~1009년)까지 90년간 기록인 '칠대실록'이다. 1011년 거란 2차 침입으로 궁궐이 불에 타자, 없어진 사관의 기록을 복원하기 위해 황주량이 왕명으로 36권의 실록을 만들었다.
그 후 현종부터 34대 공양왕까지 실록을 만들었고 23대 1259년 고종실록까지 총 185권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전부 300권이 넘은 듯하다. 139권의 고려사보다 분량이 훨씬 많았고 내용도 다양했을 것이다.
편수관을 별도로 임명했는데 역사 속의 인물인 최충, 김부식, 이규보, 이제현, 안축, 이인복, 이숭인, 정몽주 등이 역대 편수관으로 활약했다.
실록은 궁궐 내 사관(史館)을 지어 보관하다가 1227년 해인사에 외사고를 두어 1부를 필사해 보관했다. 내사고본은 1361년 공민왕 때 홍건적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대부분 소실됐고, 해인사본은 몽고군 침략으로 남해 창선도로 옮겼다가 왜구 침입으로 선산 득익사, 예천 보문사, 죽산 칠장사를 거쳐 1390년 충주 개천사에 보관했다. 조선 세종 때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한양 춘추관으로 옮겨져 보관했으나 임란 때 완전히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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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국역본 413권. 국역화 작업에 무려 26년이 걸렸으며 지금은 전산화가 완료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수록돼 있으며 CD로 나와 있다. |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 역사서이다. 연월일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천893권 888책의 방대하고 장구한 기록이다. 조선 시대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법률,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으며 내용의 진실성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실록의 편찬은 국왕이 승하하고 새 임금이 등극하면 임시기구인 실록청을 설치하고 총재관, 당상, 낭청, 편수관이 임명돼 사관의 수초(手草)를 기초로 승정원일기, 시정기 등을 참조하여 초초(初草)를 만들고 낭청 도청(都廳)의 추가 수정을 거쳐 중초(中草)가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총재관과 당상관이 오류를 점검하고 문장과 체제를 통일하여 정초(正草)인 실록을 완성했고 편수관 이름은 효종실록까지 부록에 실었다.
실록은 판본이 아닌 활자로 간행했다. 초기에 금속활자인 을해자와 갑인자로 간행하다가 임란 후 목활자로 바뀌었고 1677년 현종실록부터 별도 주조한 금속활자 '현종실록자'로 조선말까지 간행했다. 실록은 5부를 간행해 춘추관과 4사고에 보관했고 수초와 초중초는 세초(洗草)하여 내용이 누설되지 않도록 했다.
1997년 세계기록유산이 된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장구한 역사기록이다. 25대 국왕 치적의 기록으로 조선왕조 472년 역사를 담았다. 중국 대청실록은 296년, 대명실록은 260년에 불과하다. 또한 내용의 풍부함에 있어 대명실록은 2천964권에 수록 글자가 1천600만자인 데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1천965만자다. 방대한 분량, 다양한 내용, 기록의 진실성은 동아시아 타임캡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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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집권 세력이 바뀌어 수정 실록을 만들더라도 사관의 사필을 존중해 원 실록은 남겨두었으며 모두 왕조실록에 포함됐다. 〈문화재청 제공〉 |
◆국왕의 실록 명신들이 사수
역대 국왕들은 사초와 선왕의 실록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현명한 신하들은 고사를 들먹이고 선례가 된다며 왕을 설득해 친람(親覽) 유혹을 막았다.
조선을 개국하고 어전에 사관의 입시를 허락한 태조는 사초를 어떻게 쓰는지 궁금하여 사초를 가져오라고 명을 내리자 대신과 대간은 연이어 옳지 않음을 간하였고 만약 통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면 전대의 치난(治亂)흥망사를 살펴보면 될 것이며, 당대 사초는 한 번 보고 나면 뒷사람들은 왕께서 친히 본 것이니 어찌 사실대로 쓰겠느냐며 도리어 거짓 글이 되어 덕망과 치국의 전례(典禮)에 누(累)가 된다고 했다.
태종은 태조실록 편찬 후 이를 보고자 했으나 경세치국의 대학자 대제학 변계량은 친람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만류하여 명을 거두어들였고, 세종도 태종실록 완성 후 보고자 했으나 청백리 정승 맹사성이 "전하께서 이를 본다면 후세 왕들이 이를 본받아 볼 것이며 앞으로 사관들도 왕이 볼 것으로 의심하여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현명한 군주라면 보지 않으셔야 한다"고 했다.
성종은 경연에서 중국 당 태종의 '정관의 치(治)'를 이끈 명재상 방현령이 당 태종에게 당 고조 실록을 올렸다는데 어떠한지를 물어보자 경연관인 평해 출신 손순효는 "큰 잘못입니다. 역사를 사실대로 직서(直書)하지 못하고 선악이 없게 됩니다" 했고 성종은 "사관이 정도를 지킨다면 마땅히 사실대로 직서하여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왕이 실록을 가져다 보는 것은 참으로 잘못이다"고 했다.
이처럼 조선 초 국왕들은 선왕의 실록을 보고자 하는 유혹을 명신의 만류로 이겨냈고 후왕의 경계가 돼 왕조 오백 년 기록은 진실성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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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자. 크기가 1.2×1.25×0.5㎝인 금속활자로 현종실록부터 조선말까지 실록을 간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천재지변은 필수 기록
실록에는 지진, 일·월식, 별의 특이현상 등이 유난스럽게 많이 기록돼 있다. 지진이 6천700회, 일월식이 1천300회 나온다. 이는 나라의 다스림이 하늘에 그 뜻이 나타난다는 중국의 고대사상에 연원했다. 우주 현상에 침잠한 성리학의 영향으로 해와 달 그리고 오행성인 화수목금토성의 정연한 움직임은 나라의 정사와 유사하다고 해서 '칠정(七政)'이라 불렀고, 밤낮·삭망·계절 등의 어김없는 순환은 우주의 순조로움이라 했다. 그러나 지진이나 일식, 혜성 등의 천재지변은 왕의 잘못된 다스림이 하늘에 나타나는 것이라 하여 이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태조는 경연에서 "일식은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물으니, 검토관 전백영은 "인간이 하는 일을 아래에서 감촉하면, 하늘이 위에서 반응하는 것입니다"라 했고, 일·월식에는 왕이 백관을 이끌고 숭정전 월대에 친림하여 해와 달을 잡아먹힘으로부터 구하는 구식례(救蝕禮)를 올렸다. 따라서 일·월식이 생기는 시각을 미리 알고자 역법을 중시했다.
지진은 형벌을 잘못 썼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여겨 벌을 과하게 주거나 죄 없는 백성에게 벌을 주면 하늘이 알려주는 것이 했다. 주자(朱子)는 형정(刑政)이 어긋나고 음양의 조화로움이 깨어지면 지진이 생긴다고 하며 국왕이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케플러 법칙으로 유명한 독일 천문학자 케플러는 1604년 10월에 초신성 폭발을 관측한 기록을 남겼는데 선조실록에도 이 심상치 않은 천문현상이 기록돼 있다. 같은 해 음력 9월부터 초신성을 도적별이라 표현하며 6개월간 50여 회를 기록하면서 하늘의 엄한 꾸지람이 참혹하다고 했고 홍문관에서는 왕의 몸과 마음을 더욱 삼가야 한다고 했다. 당시 조선의 천문 관측과 기록은 동서양을 막론하여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제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다
사관은 국왕의 입장에서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였다. 태종이 사냥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 사관은 이 말까지 실록에 기록했다. 사관 민인생은 편전에서 쉬고 있는 태종을 밖에서 엿보다가 들켰고 경연에서 왕의 말을 들으려고 병풍 뒤에 숨어 있거나 연회에 불쑥 나타나 태종이 불쾌해 귀양을 보냈더니 이튿날 다른 사관이 그 자리에 입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필은 만고의 '부월(크고 작은 도끼)' 이라 했다. '큰 도끼는 나라의 큰일에 쓰고 작은 도끼는 백성의 보살핌에 쓴다고 했다. 국왕이 두려워하는 것은 황천(皇天·큰 하늘)과 사필뿐이라 했다. 왕은 구중궁궐에 있어 경계하는 뜻이 날로 풀리고, 게으른 마음이 날로 생기니 사관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릴 수 있겠는가'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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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색이 다른 세력으로 정권이 바뀌자 시국에 대한 견해 차이로 수정본 실록을 만들었는데 이를 개수 또는 수정실록이라 했다. 선조·광해군·현종·숙종·경종의 다섯 왕은 실록이 두 개이다. 수정본을 만들더라도 원래 실록은 온전히 그대로 남겨놓았고 모두 왕조실록에 포함됐다. 사관의 의견이 달라도 치세에 대한 평가는 후대가 하도록 사필을 존중했고 평가는 오늘날 우리 몫이다.
다만 우리 국왕의 언행을 중국 글자인 한자로 기록하여, 최근에 우리글로 바꾸는 데 무려 26년이 걸렸고 완질 국역본 413권을 숙독하려면 평생 걸릴지 모른다.
오늘날 세계적인 문화유산은 대부분 노예의 피땀과 백성의 고혈로 만들어졌다. 피라미드·콜로세움·만리장성이 그러하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어진 정치를 이끌어 내 백성을 보살폈고 백성의 눈물 없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만들었다. 그 기록의 중심인 조선 사관은 압력과 유혹을 받을 때마다 가슴에 새긴 말은 '제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였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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