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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최근에 들은 '골프에 빠진 아빠' 이야기이다. 시험에서 100점을 받은 아들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아빠, 오늘 100점 맞았어요"라고 자랑하며 내심 칭찬을 기대했는데, 골프에 푹 빠진 아빠가 아들한테 건네는 말이 "잘했네. 조금만 더 노력하면 90점대로 내려가겠네"이었단다. 이 유머에 공감하며 웃는 독자는 골프 중독의 초기증상을 의심할 만하다.
이처럼 한번 골프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코로나19 때문에 대한민국에 골프붐이 불었다고 하지만, 골프는 승부근성이 강한 데다가 점수로 서열을 매기기 좋아하는 우리 민족이 빠질만한 운동이다. 쑥쑥 늘지 않는 실력에 실망하며 그만두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주말 이른 새벽이면 몽유병 환자마냥 골프장으로 향한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하루에 24시간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골프장까지 왕복 이동거리에다가 네댓 시간의 라운딩에 식사까지 더하면 그냥 하루가 날아간다. 골프에 빠지면 다른 일에 소홀해지기 쉽다.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차일피일하다가 다가온 칼럼의 마감일이 몇 달 전부터 친구들과 골프 치자고 잡아놓은 날이다.
골프 약속은 본인상(本人喪) 이외에는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기에 일단 골프장으로 향했다. 라운딩 시작 전에 친구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원칙과 공정을 중요시해야 하는 법조인으로서 골프의 공정함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조언이 쏟아졌다. 라운딩을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골프야말로 형식적이고 기계적이 아닌 실질적 공정을 실현하는 운동이 분명하다.
첫째, 골프의 티박스는 플레이어의 능력에 맞게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기량이 출중한 사람들은 블루나 블랙티에서, 평균적인 거리를 내는 사람은 화이트티에서 치면 된다. 힘이 약한 여성들이 주로 쳐서 레이디티로 불리는 레드티는 체력적인 요소로 거리가 많이 나지 않는 사람이 쳐도 된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마저 획일적인 공정을 강조하는 각박한 사회에 참가자의 능력에 맞게 출발선을 배정해 주며 실질적 공정을 실현하는 골프의 배려심이 널리 전파되었으면 좋겠다.
둘째, 골프채 역시 각자의 능력에 맞춰 어떤 것을 선택해도 된다. 파3홀에서 홀인원을 노릴 때 일반적으로는 아이언을 많이 사용하지만 드라이버로 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위법하지 않다면 원하는 목적을 향해 나가는 방식을 다양하게 인정해 주는 골프와 비교할 때, 우리는 너무 정해진 틀로 세상사를 재단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운동을 잘하는 학생도, 봉사를 잘하는 학생도 모두 자신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으며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공정한 세상을 기대한다.
셋째, 골프는 오비나 해저드로 실수를 하더라도 그대로 퇴장시키지 않고 재기할 기회를 준다. 대신 공정하게 일정한 페널티를 준다. 이때 실수를 극복하고 좋은 점수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직장이나 조직에서 한번 실수를 했다고 영원히 매장하는 경우가 있다. 골프처럼 우리 사회도 순간의 실수이거나 진심으로 뉘우치는 잘못에 대하여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실질적 공정이 필요하다.
점수는 언제나처럼 아쉽기 그지없지만, 나이가 들어도 좋은 벗들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골프를 칠 생각을 하니 기분만큼은 100점인 행복한 하루였다. 이 칼럼에 좋은 조언을 해준 고마운 친구들에게 골프장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친구들아, 우리 인생도 오케이!"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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