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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호 해안에는 기암괴석이 발달해 있다. 바위언덕의 고딕풍 성당은 드라마 촬영을 위해 세워진 것으로 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
호수 같은 포구다. 정박한 채 주억거리는 뱃머리들 사이에 숨은 듯 낚싯대 드리운 어부가 하나, 둘 있다. 포구를 걸어 잠그듯 가로놓인 방파제에는 열둘도 넘는 낚시꾼들이 차가운 바다가 튕겨내는 가을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부동이다. "요즘은 고등어랑 숭어." 복면을 쓴 여인의 따뜻한 응답을 소리 내어 되뇌며 '분명 낚시 이력이 대단할 것'이라고 확신해 버린다. 물량장의 콘크리트 바닥은 여기저기 깨져 있다. 지난여름이 할퀸 자리일까. 아무렇게나 누운 파편들, 온전한 턱에 넋두리처럼 기댄 파편들이 가련하다. 그 곁에 1인용 텐트를 세우고 들어앉은 사내는 어부와 농을 주고받고, 어디선가 나타난 노란 고양이는 금 간 땅을 꾹꾹 누른다. 포구마을 두호의 가을이다.
다섯그루 어우러진 '죽성리 해송'
촬영세트장으로 지은 '성당' 명물
깊은 가을밤엔 멸치조업 장관도
고산 윤선도 7년여간 유배 생활
황학대 솔숲에 동상과 시비 조성
◆포구마을, 두호
두호(豆湖)는 기장 죽성리(竹城里)의 자연마을이다. 옛 이름은 두모포(豆毛浦)였다. 조선시대 때 이곳에 '두모포진'이라는 수군진영이 있었다고 한다. 진영이 설치된 것은 아마도 신라시대부터라 여겨진다. 임진왜란 이후 두모포진은 부산성으로 옮겨졌는데 그때 이름도 가져가 버렸단다. 그래서 부산포의 옛 이름도 두모포다. 두호는 두모포 앞바다를 달리 부르던 별칭이었다고 한다. 진영과 함께 이름을 잃자 마을 사람들은 두호를 마을 이름으로 정했다. 옛날에도 이 바다는 호수 같았나 보다.
포구의 물량장 한쪽에 소나무 우거진 작은 바위산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원래는 송도(松島)라는 섬이었다고 한다. 백사장이 있었고, 갯바위를 딛고 건너면 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량장과 해안도로 등으로 둘러싸인 육지다. 육지가 섬이었을 때, 고산 윤선도가 그 섬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고산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그를 도운 신하들이 횡포를 부리자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고 20년의 유배생활 중 7년여를 죽성리에서 보냈다. 그는 송도를 이태백과 도연명이 놀던 양자강의 황학루에 빗대어 황학대(黃鶴臺)라 하고 이곳에서 '우후요(雨後謠·비 온 뒤 노래)' '견회요(遣懷謠·마음을 달래는 노래)' 등 6수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황학대 꼭대기 솔숲 그늘에 바다를 향해 앉은 고산 선생과 그의 시 '영계(詠鷄·닭을 노래하다)'를 새긴 비가 있다.
황학대를 바다에서 보면 날개를 펼친 학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방파제 남단으로 이어지는 바윗덩어리가 학 날개의 조각 정도 될 듯싶다. 바위 앞에는 아궁이를 가진 사각의 콘크리트 수조가 있다. 일종의 가마솥으로 멸치를 삶는 곳이다. 두호어촌계에서 잡는 멸치는 잔멸치다. 죽성리 사람들은 '금멸치'라고 부른다. 이곳 어민은 그물을 물속에 펼쳐 놓고 잔멸치가 그물 위에 모이면 들어 올려 잡는 '들망' 어법을 쓴다. 해가 진 밤부터 해가 뜨기 전 새벽까지 바쁘다. 멸치가 도착하기 전부터 가마솥에 천일염을 넣은 물을 팔팔 끓이고 포구로 들어온 멸치는 곧장 가마솥으로 들어간다. 멸치조업 성수기는 봄과 가을이라 한다. 아궁이가 막혀 있다. 조금 더 가을이 깊어져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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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성리 해송. 다섯 그루의 나무가 모여 마치 한 그루처럼 보인다. 아름드리 줄기 한가운데는 국수당 또는 국시당이라 불리는 작은 당집이 자리한다. |
◆죽성리 해송과 죽성리 왜성
마을의 중앙 둔덕에 고고하게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가 서 있다. 황학대에서도 보인다. '죽성리 해송'이다. 품 넓은 소나무가 멀리서 보면 한 그루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다섯 그루가 하나인 양 멋있게 어우러져 있다. 나무의 수령은 300년이라고도 하고 500년이라고도 한다. 원래 여섯 그루였는데 2003년 태풍 매미 때 한 그루가 희생됐다. 다섯 그루가 방사형으로 뻗은 아름드리 줄기 한가운데는 '국수당' 또는 '국시당'이라 불리는 작은 당집이 끼워진 것처럼 들어앉아 있다. 원래 먼저 제당을 지어놓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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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대 꼭대기 솔숲 그늘에 바다를 향해 앉은 고산 선생과 그의 시 '영계(詠鷄·닭을 노래하다)'를 새긴 비가 있다. |
해송의 둔덕에서 북동쪽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하얀 비닐하우스만 선명하다. 저곳에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왜장 구로다나 가마사(黑田長政)가 쌓은 왜성이 있다. 원래는 신라시대 토성이 있었고, 왜성의 북동쪽에는 두모포진의 석성이 있었다. 왜성 축조에 사용된 돌들은 상당 부분 두모포진성에서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성 주변에는 화살의 재료가 되었던 대밭이 아직 남아 있는데 '죽성'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된다. 성으로 오르는 계단이 잘 정비되어 있건만 아쉽게도 오를 수 없다. 왜성 일대는 종교 공동체의 사유지다. 성에서 해송의 우듬지와 두호의 바다를 보고 싶었다.
◆두호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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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의 콘크리트 수조는 일종의 가마솥으로 멸치를 삶는 곳이다. 두호어촌계에서 잡는 멸치는 잔멸치로 성수기는 봄과 가을이라 한다. |
두호의 바다에는 큰거무섬, 작은거무섬, 매바위섬, 놀래미섬, 꼭두방섬 등 바위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해안에는 기암괴석이 발달해 있는데 바다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간 바위언덕에 고딕풍의 죽성성당이 정물로 자리한다. 죽성성당은 실제 성당이 아니라 드라마 세트다. 2009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드림'을 찍기 위해 세웠고 이후에는 포토존으로 이름나 두호의 명물이 되었다. 내부는 전시실로 쓰이지만 현재는 잠겨 있다. 성당은, 먼 데서 바라보면 종교적인 떨림을 일으킨다. 분명 바다 때문에, 가슴을 치는 파도 때문일 게다. 성당 입구의 아치기둥 사이에서 젊은 부부가 갓난쟁이의 사진을 찍는다. 아이의 미소를 위한 부부의 별별 몸짓에서 파도와 같은 경건함을 느낀다.
죽성성당을 지나면 길가에 장어구이나 전복죽 등을 파는 천막가게가 몇 채 늘어서 있다. 장어 굽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밤과 땅콩을 파는 트럭을 지나면 해안도로변에 넓은 물량장이 펼쳐진다. 물량장 모서리에 '두모포 풍어제터'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곳 물량장에서 두호사람들은 미역 일도 하고 멸치 일도 하고 풍어제도 지낸다. 풍어제터 표지석 너머 넓게 펼쳐진 갯바위는 매바위다. 조선 고종 때 양곡을 싣고 부산포로 가던 배가 이곳에서 침몰했다고 한다. 당시 굶주렸던 마을 사람들이 바닷물에 빠진 볏섬을 건져 먹었다가 관아에 갇히게 된다. 이에 진상조사를 위해 온 암행어사 이도재가 '바닷속에 흩어져 조류를 따라간 곳 없는 수장된 곡식을 주워 먹은 것이 무슨 큰 죄가 되겠는가' 하고 주민들을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매바위는 어사암이라고도 불린다.
어사암도, 물량장도, 텅 비어 고요한데 두호의 바다는 계속 파도 소리를 낸다. 남쪽으로는 파도를 피해 높직이 만들어진 해안산책로가 월전마을로 향한다. 굽이진 산책로에 한 사내가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저편의 도롯가에는 파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줍고, 이편의 바닷가 돌밭에는 두 사람이 타악에 맞춰 알 수 없는 소리를 읊조린다. 도처에 신성이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부산 방향으로 가다 대감분기점에서 600번 부산외곽순환도로 기장 방향으로 간다. 기장·일광 톨게이트로 나가 기장대로를 타고 기장군청, 해운대 방향으로 간다. 군청을 지나 죽성사거리에서 7시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죽성로가 시작되고 계속 직진하면 두호마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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