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완의 디자인 생각] 아름다운 책 '훈민정음'...살아있는 디자인 자산 '훈민정음' 시각적 구조도 매우 우수

  • 정재완 북 디자이너·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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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21  |  수정 2022-10-21 09:23  |  발행일 2022-10-21 제36면

[정재완의 디자인 생각] 아름다운 책 훈민정음...살아있는 디자인 자산 훈민정음 시각적 구조도 매우 우수
'훈민정음' 첫 쪽.

훈민정음. 문자 이름인가? 책 이름인가? 둘 다 맞다. 한글 문자체계의 독창성에 매료된 나머지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존재 가치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훈민정음은 '창제' 문자다. 훈민정음이 '진화' 문자가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이면 더욱 특별해진다. 훈민정음은 한자나 라틴 알파벳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니라, 1443년에 세종대왕이 새롭게 만든 글자다. 그리고 1446년에는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훈민정음' 책을 펴냈다. 세월이 한참 흘러 1940년에 경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덕분에 우리는 한글의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문자의 시작을 기록해 놓은 책 '훈민정음'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훈민정음'은 새로운 글자를 누가 왜 만들었는지, 글자를 만든 원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밝혀놓은 해설서다. 스물아홉 장짜리 책 한 권을 천천히 읽고 나면 한글의 철학적·과학적 정교함에 놀랄 것이다. 더불어 한글에 대한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킬 것이다. 다만 한자로 쓰여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대중이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훈민정음' 번역본이 마땅치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글 창제 동기·글자 원리 담은 해설서
첫 쪽 마지막 줄 'ㄱ' 배치는 전위적
각 줄의 맨 위 정렬한 스물여덟 글자
지면에서 잘 돋보이도록 계산해 설계

타이포그래피 교육은 한글 적용 한계
한글, 알파벳·한자 넘어 융합 가치 증명



[정재완의 디자인 생각] 아름다운 책 훈민정음...살아있는 디자인 자산 훈민정음 시각적 구조도 매우 우수
'훈민정음' 표지.

◆'훈민정음'은 '아름다운 책'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글자를 처음 선보인 '훈민정음' 첫 쪽은 상징적이다. 한자로 빼곡한 판면 마지막 줄에 새로운 글자 'ㄱ'을 배치한 것은 그야말로 전위적이다. 'ㄱ'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은 것은 대범하고 예리한 감각이다. 붓으로 쓴 해서체 한자와 달리 수평과 수직선이 붙어있는 각진 모양을 한 'ㄱ'은 강렬한 형태적 대비를 이루면서 '우리말과 중국말이 서로 다르다'는 어제 서문 첫 문장을 시각적으로 번역해서 설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북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임금이 쓴 글과 신하가 쓴 글의 위계를 한쪽에 들어가는 글자의 크기와 개수에 차이를 둬서 표현했다. 또한 새로 만든 스물여덟 글자를 각 줄의 맨 위에 정렬함으로써 지면에서 돋보이도록 연출했다. 한 권의 책을 디자인할 때는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고 시각적인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면에서 '훈민정음'은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나다. '훈민정음'은 과거에 머물러있는 고문헌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살아있는 디자인 자산이다.

◆디자인의 기본 재료, 한글

내가 '훈민정음' 공부를 시작한 것은 2005년 즈음 북 디자이너 정병규의 '훈민정음론' 강의였다. 글자를 다루는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한글 문자학이었다. 국어학자의 책을 강독하고 해설하는 강의는 낯설고 어려웠다. 익숙한 문자였지만 내가 모르는 내용이 이렇게 많았다니 놀랍고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한글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었다. 당시에는 '훈민정음'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공부의 성과라면 '훈민정음'은 이제 평생 함께 어울려야 할 동반자임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 후 다시 한번 '훈민정음'을 공부한 것은 2010년 대학원에서 타이포그래퍼 안상수의 '훈민정음 디자인론' 강의를 들었을 때다. 개성 있는 한글 꼴을 디자인해 온 안상수의 '훈민정음' 강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업이었다. 수업을 듣는 내내 허공에 글자들이 날아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훈민정음' 해례본(영인본)을 구입해서 전체를 필사했던 과제도 기억에 남는다. 손으로 베껴 쓰면서 한글의 시원적인 모양을 따라 그릴 때는 적잖이 흥분하기도 했다. 1970~80년대 한국 그래픽 디자인 현장에서 출판 디자인과 작가주의적 한글 실험 작업에 매진했던 두 스승으로부터 배운 '훈민정음' 공부는 지금까지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북 디자이너인 내게 '훈민정음'은 왜 이렇게 각별한 책이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일상에서 매일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디자인 재료가 한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글 타이포그래피와 '훈민정음'

그래픽 디자이너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다루는 일을 한다. 텍스트는 주로 한글로 쓴다. 신문, 잡지, 책, 전시회·공연·축제의 포스터, 거리의 안내판이나 상점의 간판 등 그래픽 디자이너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에는 언제나 한글이 표기된다. 대학에서는 타이포그래피를 배운다. 글자를 그리고 배열하는 기술을 훈련하는 기초 과정이다. 우리의 타이포그래피 교육은 서양의 인쇄 조판술에서 그 방법론을 빌려온 것이다. 안타깝게도 타이포그래피 교육은 한글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서 라틴 알파벳에 적용하는 기술로 한글을 다루려고 하면 해결하기 힘든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가령 동일한 글자체의 다양한 굵기, 필기체에서 비롯된 이탤릭(기울임 글자체) 스타일은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의 글자 생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글자의 폭이나 높이 개념이 다르고, 문장부호의 형태와 위치도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는 글줄의 진행 방향 또한 달랐다. 산업화 이후 기계화 과정에서 한글을 편리하게 사용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서로 다른 문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한글을 사용하는 디자이너가 정작 한글을 공부하는 것에 너무 게을렀던 것은 아닐까 반성해본다. 그래서 한글의 기원인 '훈민정음'을 살펴보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의 특성을 이해하는 과정이 무척 중요하게 여겨진다. 디자이너는 '훈민정음'이라는 한글 사용 설명서를 책상 앞에 두고 차근차근 읽고 보면서 한글과 한자, 라틴 알파벳의 차이를 알고 '한글 문자학'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 한글에 관해서라면 문제도 해답도 '훈민정음'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정재완의 디자인 생각] 아름다운 책 훈민정음...살아있는 디자인 자산 훈민정음 시각적 구조도 매우 우수

◆'훈민정음'의 가치

훈민정음이 한국의 디자이너들에게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이제 한글을 거론하지 않으면 세계 문자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한글은 젊은 글자다. 수천 년 역사의 한자와 라틴 알파벳에 비하면 이제 576년 된 한글은 역동적이고 무한한 잠재력을 품고 있는 글자다.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쉬운 글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이전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여러 언어와 문자를 학습한 후 뜻글자와 소리글자의 장단점을 살펴서 무엇이 편리하고 불편한지를 유심히 분석했으리라. 그래서 한글은 소리를 시각화하는 과정에서는 표음의 성격을, 글자를 모아쓰는 방식에서는 표의적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 한글은 서양의 라틴 알파벳 문화와 동양의 한자 문화를 가로지르며 융합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는 해마다 전 세계의 '아름다운 책'을 모으고 북 디자인이 뛰어난 책에 시상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관하여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선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주어지는 이 상의 이름을 '훈민정음 상'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아름다운 책 '훈민정음'이 고요한 박물관에만 갇혀 있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북 디자이너·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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