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형의 스포츠와 인문학]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다…"죽기 전에 KBO에서 내 홈런 신기록이 깨지는 걸 보고 싶다"

  • 박지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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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21  |  수정 2022-10-21 08:57  |  발행일 2022-10-21 제37면

[박지형의 스포츠와 인문학]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다…죽기 전에 KBO에서 내 홈런 신기록이 깨지는 걸 보고 싶다
2003년 10월2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롯데 경기에서 이승엽이 2회초 시즌 56호 홈런을 친 후 기뻐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평생 야구를 보면서 가장 행복했던 두 해를 꼽으라면 1999년과 2003년을 꼽을 것 같다. 내가 응원하던 삼성 라이온즈는 99년 PO에서 롯데에 비참하게 패했고, 2003년에도 준플레이오프에서 SK에 스윕을 당했는데 왜 나는 그 두 해를 꼽았을까? 야구를 조금만 알아도 정답은 쉽게 맞힐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 두 해는 이승엽에 의해 한국프로야구 홈런 신기록이 새롭게 써진 해였다.

홈런 신기록이 응원팀 우승보다 더 좋으냐고 누가 묻는다면, 난 그렇다고 당당하게 대답할 것 같다. 누군가가 "그것은 야구를 응원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난 묵묵히 내 입장을 고수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이승엽은 내게 환상의 거울 속에 비친 자아와 같은 존재였다. 라캉이 말했듯 그 두 해, 난 타자(?)의 욕망을 욕망했다. 이승엽이 홈런을 치는 날이면, 나는 항상 푸른 유니폼을 입고 대구시민운동장의 그라운드를 무표정하게 돌아 홈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엽이 드디어 마지막 경기에서 56호 홈런을 때렸을 때, 그 위대한 신기록을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난 혼자 방에서 가상의 마이크를 잡고 신기록 달성 소감도 몇 번 중얼거린 적이 있다. 내가 진짜 이승엽보다 잘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는 없었으니.

[박지형의 스포츠와 인문학]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다…죽기 전에 KBO에서 내 홈런 신기록이 깨지는 걸 보고 싶다
박지형 문화평론가

홈런 신기록을 세우는 선수에게 과한 몰입을 하는 전통은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61년, 뉴욕 시민들은 미키 맨틀이라는 조각 미남 스위치히터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가 양키즈 선배인 베이브 루스의 대기록에 접근하자 뉴욕의 야구팬 대부분은 그에게 자신을 투사하며 신기록 달성의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맨틀이 레이스 도중 부상당하고 페이스메이커 정도로 생각되었던 밉상 로저 매리스가 신기록을 세우게 되자, 뉴욕은 (자기 팀 선수) 매리스에게 온갖 야유와 저주를 퍼붓기에 이른다. 환상의 자아상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리는 것을 당시의 대중들은 매우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비슷한,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두 번 반복되었다. 2001년 터피 로즈, 그리고 2002년 알렉스 카브레라가 그 피해자였다. 이들이 오 사다하루의 일본 프로야구 홈런기록 55호에 도달하자, 그 뒤로 이들을 상대하는 모든 투수는 모여서 회의라도 한 듯 노골적으로 승부를 피해버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로즈, 베네수엘라 출신인 카브레라 둘 다 일본인들이 자신의 거울상으로 삼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올해 미국과 일본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홈런 레이스가 펼쳐졌다. 양키즈에는 애런 저지라는 대 타자가 나와 61년 만에, 61년에 세운 61호 기록을 깨뜨렸고, NPB에서는 야쿠르트의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일본인 홈런 신기록을 56호로 늘려 놓았다. 저지는 약물 없이 세운 '청정 신기록', 무라카미는 '일본인 신기록'이라는 타이틀을 따내긴 했지만, 그래도 둘 다 진짜 신기록을 세운 것은 아니라 살짝 김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쨌든 그런 걸 구경하다 보니 나도 소원이 하나 생겼다. 죽기 전에 KBO에서 내 홈런 신기록이 깨지는 걸 보는 것. 홈런 신기록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니 삼성 라이온즈 선수가 아니라도 순순히 허락하겠다. 어느 팀 어떤 선수라도 좋다. 다시 한번 대한민국의 외야석을 잠자리채로 온통 뒤덮어 달라. 이제 세월에 흐려진 내 환상의 거울상은 깨어진들 어떠리. 누구든 어서 57번만 홈으로 여유 있게 걸어 들어와 주시란 말이다. 그래야 이 땅의 다음 세대들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다 반평생을 신기록 달성자로 살아가는, 그 비범한 영광을 한 번 맛볼 수 있지 않겠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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