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양회관 100년을 돌아보다

  • 오상균 광복회 대구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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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19 08:07  |  수정 2022-10-19 08:10  |  발행일 2022-10-19 제25면
오상균
오상균 광복회 대구시지부장

100년 전 대한민국. 국권은 빼앗겼지만,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을 향한 백성의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대구지역에서는 그 중심에 조양회관(朝陽會館)이 있었다. 대구 중구 대신동 1번지에 세워진, 당시로써는 번듯한 2층짜리 이 건물은 교육·문화·예술 활동을 모두 수용하는 종합 공간 역할을 했다.

헐리지 않고 본래 모습을 간직한 채 40년 전 제자리를 떠나 금호강변 효목동으로 옮겨 왔다. 이 역사적인 건물에 광복회가 입주해 오늘날까지 조양회관 건립의 큰 뜻을 받들어 그 정신을 계승해 오고 있다.

올해로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조양회관 설립 취지문을 다시 읽어 본다. 마지막 문구는 이러하다.

"조양회관은 우리 민족 운동의 근거 있는 진영이 되며, 시대 요구의 권위 있는 기관이 되기를 자기(自期·마음속으로 스스로 기약함)하는 바이다."

일제강점기 옛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육당 최남선의 조선사(朝鮮史) 강의, 동경 유학생 시국 강연 후 검거된 사건, 1926년 대구청년총회, 1930년 대구노동총회 등 각종 민중 집회와 대구여성청년회·근우회 창립총회 등이 이곳 조양회관에서 열렸다. 그리고 미술 전시회와 재봉 강습, 한글강좌와 에스페란토강좌 등 문화교육·강습이 이어졌다.

일제 말기에는 대구부립도서관으로 징발되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경북도당사로, 6·25전쟁 땐 유격대 병영으로 격변의 시기 대구 근대사로 점철된 장소로 사용돼 온 것이다.

6·25전쟁이 끝난 후 조양회관 설립 주도자인 동암 서상일(1887∼1962) 선생은 우리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상이고 교육을 통한 정신무장이라고 판단했다. 동아일보 지국을 하면서 알게 돼 사위로 삼은 독립운동가 우재 이시영 지사의 외아들인 아동문학가 이응창과 원화여중을 설립하고 학교법인 이름을 조양회관으로 했다. 이사장직을 맡아 오던 중 1980년 원화여고가 달서구 성당동으로 이전키로 해 매수자인 월성산업이 이 건물을 철거하고자 했으나 광복회를 비롯한 시민들의 반발로 대구시가 매입했다. 이후 1984년 효목동 망우공원 현재의 자리에 원형을 살려서 복원됐다. 그해 7월 광복회 대구지부가 입주해 40년 가까이 건물 관리를 맡고 있다.

조양회관 건립에서 서상일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석천 백남채(1888∼1950)다. 1919년 3월8일 대구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에 계성중 학생을 동원해 독립의지를 고창해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로, 그 후 대구요업사를 설립하고 지금의 조양회관 붉은 벽돌을 제공했다. 건물 설계는 당시 일본인 건축가를 배제하고 윤학기(1901∼1967)라는 대구 출생 건축가에게 설계토록 하는 등 애국심의 단면을 보여 주게 된다.

세월이 흘러 효목동 망우공원 외진 곳에 있게 된 조양회관은 시민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버렸고 민족 자주와 독립을 꿈꾸었던 선각자들의 소망과 노력은 다음 세대에게 잊혀갔다.

이에 건립 100년을 맞아 조양회관을 세우고 그 자리에 모여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선각자들의 소망과 노력을 기억하고 그 희생과 헌신에 다시 한번 경배하고자 20일 작은 음악회로 기념하고자 한다. 벽돌 한 장 한 장마다, 마루 쪽 하나하나마다 선조의 땀이 깃들어 있고 그 공간에는 선열의 민족정신이 숨 쉬고 있음을 느끼고자 한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앞으로 조양회관이 대구의 역사와 함께 100년사로 기록이 남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오상균<광복회 대구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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