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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윤석열 정부의 첫 내각에서 단연 주목되는 인물이다. 서울에서 4선을 쌓은 국회의원이고, 박근혜 정부에서 주중국대사를 지냈으며, 대통령선거에서 선거대책본부장과 사무총장을 겸했고, 대통령직인수위에서도 부위원장이었다. 게다가 대통령처럼 서울 출신이고 서울 법대를 나왔으며 사법연수원 15기로 법조 경력상 한참 선배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과는 대학 시절 형사법학회 선후배로 만나 오랜 교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통령에게 수시로 직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새삼 장황하리만큼 내각에서 권 장관의 위상을 짚어 본 까닭은 갈수록 꼬여가는 윤 정부의 외교 노선을 보완할 방도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윤 대통령은 두 차례의 순방 외교를 통해 지나칠 만큼 노골적으로 자유에 방점을 둔 이른바 가치연대와 한미일 동맹 복원을 내세웠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외교적 진실은 윤 대통령의 노골적인 프러포즈를 미국과 일본이 부담스럽다는 듯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한반도의 외교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 같은 답이 돌아올 것이다. 엄정한 국제정치의 현장에서 자유를 통한 가치연대나 한미일 동맹은 어차피 대한민국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고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미국이나 일본으로서는 그 가치연대와 동맹을 위해서 윤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빌 게이츠가 선도하는 재단에 1억달러 내는 것을 시작으로 이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구체적인 청구서들이 날아올 것이고, 그 하나하나에 관해서 윤 정부는 외교적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먼저 말 잔치를 벌인 다음, 나중에 뒤로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이처럼 난처한 상황이 가까이에 벌어질 수 있음을 예감한다면, 윤 정부의 외교 담당자들은 이제라도 서둘러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하여 가장 큰 책임은 권영세 통일부 장관에게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능동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미국과 일본을 설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카드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실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는 에너지 수급 문제를 중심으로 블록화의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고, 그 와중에 미국과 일본은 대중국 고립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만약 윤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 카드를 확보하여 선제적으로 내세우지 못한다면, 조만간 사드를 넘어서는 전략 무기의 추가배치 수용,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국군의 해외파병과 같은 군사적 의제들이 미국으로부터 먼저 제기될 수 있다. 그 뒤를 일본의 무리한 경제적 요구가 이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므로 윤석열 정부의 외교 노선을 본 궤도에 올리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의 책임자인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성과를 내야 한다. 부탁하건대, 자유를 통한 가치연대나 한미일 동맹의 강화와 관련하여 김대중 정부의 경험을 참고하길 바란다. 햇볕 정책을 통한 남북관계의 진전을 외교적 지렛대로 삼아 김대중 정부는 미국이 한국과의 동맹 강화에 더욱 절실하게 나서도록 만들었고, 일본 역시 과거사 청산은 물론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성을 띨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IMF 경제위기 속에서 극한대치의 남북관계를 물려받았음에도 어떻게 조기에 상황을 반전시켰는지부터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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