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철원 백마고지~노동당사…백마고지서 산화한 국군 전사자 넋을 기리며…

  • 김찬일 시인·방방곡곡트레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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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28  |  수정 2022-10-28 08:38  |  발행일 2022-10-28 제38면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철원 백마고지~노동당사…백마고지서 산화한 국군 전사자 넋을 기리며…
철원 노동당사.

철원 평야의 누런 벼가 가을을 물들인다. 사방을 에워싼 산에도 울긋불긋한 색채가 감돌기 시작한다. 대구에서 6시간을 달려 백마고지에 당도했을 때, 가을 하늘은 드높았고 무언가 격정의 감정이 요동친다. 광장에는 앞다리를 세워 하늘로 오를듯한 백마의 동상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저 백마는 1950년대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꿈이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를 그린 만화를 본 뒤, 백마를 타고 적군을 물리치는 상상은 꿈이 되었다. 오늘 백마 동상은 그 꿈의 현실이 되었다.

다가갈수록 살이 떨리는 백마고지, 지금부터는 까치발로 걸어 나간다. 백마고지 전적비가 보인다. 백마고지는 이전에 이름도 없는 395고지였다. 한국 동란 때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피아간 격렬한 전투, 상상을 초월하는 폭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 공중에서 보면 마치 백마가 쓰러져 누운 형상이므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럼 백마고지 전투를 마름질해 보자.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철원 백마고지~노동당사…백마고지서 산화한 국군 전사자 넋을 기리며…
백마고지 입구 백마 동상.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의 전면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동란은 남한에는 유엔군이, 북한에는 중공군이 참전하여 확전되고 1952년에는 전쟁의 피로로 휴전회담이 열리던 때였다. 그러나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무산되자, 중공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참혹한 고지전이었다. 그 당시 철원 서북방에 자리한 395고지(高地)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드넓은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지키는 군사 전략상 요충지였다. 게다가 휴전이 임박했으므로 한 치의 땅이라도 빼앗으려고 피아간에 사력을 다하던 때였다. 그리고 395고지 남쪽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방어에 절대 불리했으므로 아군은 반드시 확보해야 할 고지였다.


피의 능선 6·25전쟁 최대 격전지 지나
DMZ평화의 길에서 본 금학산·고대산
北 공산독재 강화 도모한 '노동당사'
현재 건물은 앙상한 뼈대·잔해만 남아
무수한 고문·끔찍한 악행 일어났던 곳
분단의 아픔 상징처럼 남아 가슴이 저릿


당시 국군 제9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 홍천전투에서 북한군의 탱크부대를 패퇴시킨 명장 김종오 소장의 지휘하에, 9월경 철의 삼각지 한 축인 철원에 투입되어 395고지를 기점으로 동쪽 중간리까지 11㎞에 이르는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51연대, 제53 전차중대, 제1 포병단과 미군의 제5공군, 제73 전차대대, 제49·213·955 포병대대가 지원부대로 배치되었다. 상대적으로 국군 제9보병사단 정면에 포진한 중공군 제38군은, 군단장인 장융후 예하 113·114 사단과 후방지원부대로 제112 사단, 즉 3개 사단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중공군 제38군은 총병력 4만4천56명으로 편성된 최정예 부대였다.

중공군의 공격을 간파한 김종오 제9사단장은 9월22일 좌 전방 395고지에 제30연대, 우 전방에 제29연대를 전개하고, 제28연대를 예비부대로 편성, 긴급 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또 제51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 철원 평야 일대 취약한 주 방어선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일촉즉발의 시간이 흐른 10월6일 중공군은 각종 포 55문의 지원 사격을 받고, 대형 저수지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 역곡천을 범람 시켜 국군의 후방 지원을 차단하면서 기습 공격, 백마고지전투는 시작되었다.

첫날 전투에서 중공군 정예병들이 맹렬히 돌격하였으나, 국군 제30연대가 용감하게 잘 막아 내었다. 당일 세 차례나 격렬하게 싸웠음에도 중공군은 고지를 빼앗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10월7일 전열을 가다듬은 중공군이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2개 대대로 제 4차 공세를 감행 395고지를 함락하였다. 여기에 질세라 국군 제28연대가 치열하게 반격 395고지를 탈환했다. 일진일퇴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0월8일 중공군은 예비연대까지 투입, 제5차 공세로 오전 8시 다시 395고지를 점령했으나 국군 제28연대 3대대가 즉각 반격하여 395고지를 되찾았다. 이렇게 불과 3일간 치른 5차례 공방전에서 중공군 제38군 113·114 사단의 병력 소모가 심각했고, 국군 제28·30연대도 재편성이 안 될 정도로 병력피해가 막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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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DMZ 평화의 길'

그러나 10월9일 중공군이 남은 전력을 끌어모아 제6차 공세를 펼치자, 전투력이 바닥난 국군 제30연대는 어쩔 수 없이 고지를 내주고 후퇴하였다. 이때 김종오 소장은 비교적 전력이 온전한 제29연대를 신속히 투입 역습하여 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은 제112사단까지 증원해 10월10일 쌍십절 날 대규모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오자, 국군은 제9사단의 잔병들로 맞받아쳐 참호 속에서 백병전으로 아비규환의 살상전이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이날 피아간 3차례의 공방 끝에 마침내 중공군이 고지를 점령했다. 그다음 날인 10월11일 국군 제29연대 1대대가 필사적으로 돌격 고지를 탈환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생지옥 같은 전투는 4일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0월15일 새벽 국군 제28연대가 기습 돌격으로 395고지를 완전히 탈환하고, 제29연대도 고지 북쪽 전초기지를 장악해 중공군을 철저히 패퇴시킴으로써 그 처참한 고지전이 종결되었다.

정말 피와 살이 튀는 처절한 전투였다. 이 열흘간 12차례 대규모 공방전으로 백마고지는 허연 흙무덤이 되었고 중공군 약 1만4천명, 국군 3천396명이 전사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9천954발, 중공군은 5만5천발(총 27만4천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이 주간 669회 야간 76회 출격하고 한국 공군도 745회 출격했다. 그리고 네이팜 탄 358발 포탄 2천700발을 백마고지에 투하했다. 백마고지에 쏟아부은 폭탄을 길이대로 잇는다면 서울과 부산을 이을 수 있다고 한다. 정말 소름이 돋고 끔찍할 수밖에 없는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395고지는 '백마고지'로, 국군 제9사단은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또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유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과 함께 고귀한 피를 엄청나게 흘렸다. 저 백마고지에서 산화해간 국군 전사자들의 하얀 영혼이 백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국민의 추모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고 있을 터이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철원 백마고지~노동당사…백마고지서 산화한 국군 전사자 넋을 기리며…
백마고지 위령비.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철원 백마고지~노동당사…백마고지서 산화한 국군 전사자 넋을 기리며…
김찬일 (시인·방방곡곡트레킹 회장)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전무후무한 자유와 풍요는 한국전쟁에서 흘린 국군과 유엔군의 피의 강에서 건져 올린 영원한 가치이며 의미일 것이다. 태극기와 자작나무의 길을 지나고, 위령비와 시계탑도 관람한다. 에밀레종을 모방한 종각 상승각도 살피고, 'DMZ 평화의 길'에서 북녘의 금학산과 고대산을 바라본다. 그 더 북쪽 하늘에는, 3대 세습 독재 아래 자유를 잃고 신음하며, 경제마저 피폐한 북한 주민들의 헐벗은 그림자가 실루엣을 그린다.

우리는 분단의 한과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백마고지를 떠났다. 돌아오면서 인근에 있는 노동당사에 들렀다. 지금은 건물 뼈대와 잔해만 남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 역사는 우리 의식의 피고름 악성 종양이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북한 김일성 정권이 소련의 사냥개가 되어 공산 독재 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축하여 6·25 사변 전까지 사용한 북조선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이 노동당사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의 자유민주주의 인사 체포·고문·학살과 주민 수탈 등 모골이 송연한 만행을 수없이 저질렀으며, 한번 노동당사에 끌려가면 시체 또는 반송장이 되거나 불구가 되어야 비로소 종결되는 무자비한 압살을 자행한 곳이다. 노동당사 뒤 방공호에서는 고문에 사용한 철사 줄과 다량의 실탄이 발견되었다. 이에 철원군에서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악형과 처형의 잔인한 통치가 심해질수록 도리어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더 갈망하고 수호하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는 우리 생명의 메타포요. 키워드이며 해시태그이다.

글=김찬일<시인·방방곡곡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백계분 <여행사진 작가>

☞문의 : 강원도 철원군 철원군청 (033)450-5365

☞내비 주소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평화로 3591

☞트레킹 코스 : 백마고지 - DMZ평화의 길 - 노동당사

☞인근의 볼거리 : 고석정, 평화전망대, 월정리역, 제2땅굴, 은하수교, 한탄강 잔도길, 삼부연 폭포, 동송 전통시장, 승리전망대, 소이산 재송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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