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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 |
고구려 금관은 아직 확인된 게 없지만, 고깔을 금은으로 꾸며 관으로 착용한 기록으로 볼 때 출토될 여지가 있다. 기록에 나오는 왕관은 황금으로 꾸민 흰색 비단을 감싼 모자인데, 모관 형태의 백라관(白羅冠)이다. 금동관은 깃털 모양 꾸미개를 끼운 조우관(鳥羽冠)이며, 귀자(貴子) 즉 고위관료의 관으로서 이 역시 모관 형태이다.
백제 금관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연꽃 모양 꾸미개로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왕관은 황금 꽃과 검은색 비단으로 꾸민 금화식오라관(金花飾烏羅冠)이다. 고위관료는 은으로 만든 연꽃을 끼운 은화식관(銀花飾冠)을 썼다. 기록은 웅진백제 후반부터 사비백제까지의 실물과 일치한다. 연꽃 모양은 불교적 세계관이 오롯이 자리 잡았음을 말한다. 앞선 한성백제부터 웅진백제 전반까지 관에는 용무늬나 풀꽃무늬를 새겼다. 이 모든 백제의 관은 모관이다. 나주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은 대관과 모관을 조합한 독특한 모양인데, 독자적인 지역 정치체에서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재래신앙과 불교의 세계관이 섞였고 무령왕릉의 연꽃 모양 꾸미개와 유사하므로, 웅진백제 왕실의 통제 아래에서 제작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의 관은 왕과 신하의 복식을 규정하는 관복제(官服制)에 따라 만들었음이 뚜렷하다. 이 나라들의 금관은 왕의 권위를 돋보이는 장치로써 유기질 모자에 황금 장식을 꽂거나 붙이는 방식을 따랐다.
가야 금관은 기록과 발굴된 게 없으나, 우리나라와 일본에 도굴품이 있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의 오구라컬렉션 금관은 낮은 금 함량 탓에 여러 곳이 부러졌다. 대구의 거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하였으며, 경남에서 나왔다고만 알려졌다. 호암미술관 금관은 최근에 고고자료를 검토한 결과, 대가야의 왕릉인 고령 지산동 45호분 부장품이었다. 분리된 머리띠, 세움 장식, 곱은옥을 다시 조립한 상태이기에 원형을 알 수 없는데, 아쉽게도 이 상태로 국보가 되었다. 가야 금관은 대체로 대가야가 왕성했던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 만들었으며, 모두 대관 형태인 점에서 신라와 공통된 재래신앙체계의 산물이다. 가야의 금관과 금동관은 풀꽃에서 모티프를 구하였지만 통일된 의장을 확인할 수 없다. 이 점은 삼국의 정치력에 미치지 못하는 가야의 상황을 유추하게 한다. 관복제와 불교 세계관이 명확한 고구려와 백제, 재래의 전통과 신앙이 강력한 신라와 가야, 이 두 범주에 따라 금관의 양상도 나뉜다.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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