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4] 고산 황기로 (상)... 용이 날고 호랑이가 웅크리며 귀신이 출몰하는 형태, 신묘하고 괴이함이 가히 헤아릴 수 없어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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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04 07:46  |  수정 2022-11-04 07:49  |  발행일 2022-11-04 제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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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로 지정된 황기로 초서 '이군옥시'(부분).

황기로(1521~1575 이후)는 '초성(草聖)'이라 불릴 정도로 초서를 잘 썼던 서예가다. 호는 고산(孤山), 매학정(梅鶴亭) 등이다.

14세(1534년) 때 진사가 되어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서예에만 정진해 서예의 대가가 되었다. 특히 초서에 능했다. 모재 김안국과 같이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 선비들이 그의 남다른 서예 솜씨를 알아보고 '해동장옹(海東張翁)'이라 불렀다 한다. '조선의 장욱(張旭)'이란 뜻인데, 장욱은 당나라 때 초서에 뛰어나 '초성(草聖)'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또한 황기로를 '왕희지 다음으로 첫째(王羲之後一人者也)'라 하며, 글씨 한 폭씩 얻기를 원했다 한다.

그는 조부(황필)의 뜻을 받들어 벼슬을 하지 않고, 경북 선산의 낙동강 변에 있는 고산(孤山)에 매학정(梅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글씨와 술로 일생을 보냈다. '매학정'이란 호칭은 중국 항저우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살아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렸던 북송의 시인 임포(林逋)의 삶을 동경한 데서 비롯됐다.

그가 벼슬길을 버리고 매학정을 짓고 세상을 등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조부가 성균관 시절 익명의 투서사건에 휘말려 평생을 수모와 오욕을 감수해야만 했고, 부친이 당시 신진 사림의 거두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를 처단할 것을 주장해 결국 사판(士版)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치욕을 겪는 등 조부 때 시작된 가환(家患)이 있었던 것이다.

황기로의 42세 때 모습에 대해 사돈인 율곡 이이는 '빈 뜰에 매화 송이 피어오르고 깊은 못에서는 학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10여 리 떨어진 곳에서 텃밭을 일구는 신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황기로에게 술과 글씨는 울적한 심사를 달래줄 수 있는 탈출구였다. 그는 술을 매우 좋아해 취흥을 빌려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 일화는 다음과 같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전한다.

"황기로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고 초서를 잘 썼다. 그의 글씨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큰 잔치를 열어 황기로를 맞이하였는데, 원근의 손님들이 각기 하얀 비단이나 꽃무늬 종이를 수백 축씩 가지고 왔다. 황기로는 종이가 많을수록 더욱 재주를 보였다. 붓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집에서 좋은 붓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다만 먹을 서너 말 갈게 하고는 주인집의 몽당붓을 거두어 모았는데, 아이들이 담장 위에 버린 붓이나 부녀자들이 언문 편지 쓰다 남은 것 따위를 모두 합하여 묶었다. 몇 자나 되는 긴 붓대를 사용하였는데, 붓대의 끝부분은 잘라 끈으로 매어 묶었다.

날이 저물도록 몹시 취하게 마시고 붓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모든 손님은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술에 대취하여 붉은 것과 푸른 것을 분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손으로 붓대 끝을 움켜잡고, 손가락은 쓰지 않았다. 먹을 묻혀 마음대로 붓을 휘두르는데, 한번 붓을 휘두름에 능히 수백 장을 써내 날이 기울기 전에 마쳤다.

용이 날고 호랑이가 웅크리며 귀신이 출몰하는 형태는 천변만화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의 서법은 대개 장욱과 장필(張弼·명나라 서화가)을 근본으로 하였으나, 신묘하고 괴이함이 가히 헤아릴 수 없어 스스로 조화의 공을 이루었으니, 비록 중국에서도 수백 년 동안 이와 견줄 만한 이가 드문 것이다."

이이는 황기로의 50여 평생을 '취묵(醉墨)과 감상(甘觴)'의 세월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술과 글씨에 묻혀 평생을 살다간 그의 삶을 보여주는 함축적 표현이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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