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룡 대구시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이 밝은 모습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지금 저는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계속 남의 도움만 받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지난 10월 27일 대구시 중구 남산동 대구시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재룡 회장의 말이다. 지난 25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개최한 제43회 흰지팡이의 날에서 대회사를 하던 당시처럼 김 회장은 시종일관 목소리에 자신감이 있었다. 행사 당일은 너무 바쁘고 경황이 없어 이틀 뒤 찾아간 사무실에서도 그는 기자를 정중하고 따뜻하게 맞이하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1970년 경북 의성군 옥산면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서서히 시력이 약해지더니 17세부터 완전히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사춘기에 1급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 괴롭지 않았을까?
김 회장은 는 힘들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눈물도 많이 흘리셨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좌절만 하고 평생을 보낼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고 대구광명학교 고등부에 입학했다. 학교생활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 "1주에 한 번씩 경북기계공고 운동장을 25바퀴씩 (10㎞)을 뛰면서 강한 의지력도 갖게 됐다. 장애인도 열심히 하면 비장애인보다 더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고 덧붙였다.
광명학교에서 침과 안마기술을 배우고 22세의 나이에 사회에 나온 그는 안마를 하며 대학교 사회복지학과도 졸업했다. 나중에는 안마원을 운영하며 나온 수익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사업수완 이 좋아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자신처럼 어려운 시각장애인 들을 위한 공익활동에 뛰어들었다.
대구시각장애인 연합회 달서구지회장·대한안마사 협회 대구지부장을 역임하다가 2014년 대구시각장애인협회 회장에 당선됐다. 4년 임기의 회장에 당선되자마자 그는 공약 이행을 위해 나섰다. 그는 "복잡한 남문시장 안에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에 있던 연합회 사무실을 현재의 대구도시철도 명덕역 인근으로 2년 만에 옮겼다. 또 노인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경로당이 없음을 알고 노인들만을 위한 주간보호센터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구시장과 시청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다"고 고마운 마음도 전했다.
올해 1월, 3선에 성공한 그는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월급(직책보조비) 250만원 전액을 7년째 시각 장애인협회후원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로 어려움을 겪는 대구시민들을 위해서 라면과 떡국·간편 조리식품 등 1천700만원 어치를 중·남·달서구청에 보냈다. 초창기 마스크를 많이 후원받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단다.
그는 경로당에 안마사를 파견하는 재활자립센터를 운영해 22명의 시각장애인들의 일자리도 창출하고 장애인 고용장려금도 받는 등 시각장애인 들에 대한 복지 사업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활동과 노력은 시각장애인만의 범위를 넘어 그를 지난해 12월 대구장애인단체협의회 회장으로 추대토록 만들었다.
왕성한 활동력과 뛰어난 사업추진력으로 전혀 장애인이란 인식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그에게도 아쉬움은 있었다. 김 회장은 "한 번 만이라도 눈을 떠서 우리 아이들 얼굴을 한번 볼 수 있다면…"이라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직원들 이야기로는 잘생긴 아들과 딸 2명을 키우고 있단다.
글·사진=박태칠 시민기자 palgongsan72@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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