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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기사 최초로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한 최정 9단. 〈한국기원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
최근 사람들은 '최정 앓이' 중이다. 한국시리즈 5차전 투런포의 주인공 최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바둑기사 최정 이야기다. 그녀는 이번 삼성화재배에서 결승에 올랐는데, 여성 프로기사가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한 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4강 진출도 30년 만) 대진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다. 결승까지 가는 과정에서 일본의 기성 이치리키 료를 꺾었는가 하면, 올해 LG배에서 결승까지 올랐던 중국의 양딩신도 쓰러뜨렸다. 4강에서는 현재 한국 랭킹 2위인 변상일을 잡았는데, 이전까지 최정은 그에게 내리 5연패를 하던 중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처녀 사냥꾼'으로 유명한 아탈란타는 인류 역사상 거의 최초로 '성 대결'을 벌인 여성일 것이다. 아탈란타는 용에게서 황금 양털을 훔치기 위해 조직된 '아르고호' 팀에 합류하려 했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승선을 거부당한다. 그 뒤 그녀는 칼리돈에서 커다란 멧돼지가 횡포를 부리자 수많은 남자 영웅들의 틈바구니에서 그 괴물의 사냥에 나서게 되는데, '여자가 무슨 사냥'이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그녀는 첫 화살을 멧돼지에게 꽂는 쾌거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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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제외하고 보면 21세기 이전까지의 인류의 문화에서 성 대결은 성립 자체가 어려운 구조였다. 놀라운 일이지만, 19세기 미국 남부의 몇몇 주는 흑인 노예에게도 제한적으로 투표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와중에도 여성 투표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남자 노예보다 대농장주 마님의 참정권이 더 약했던 것이 20세기 이전의 현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 대결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성 대결은 21세기부터 시작되었다. 2004년에는 한 14세 소녀가 PGA 투어 소니 오픈 2라운드에서 2언더파 68타를 쳤다. 그 유명한 미셸 위(위성미)가 세계에 이름을 알리며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뒤 그녀는 '성의 벽'을 깨뜨렸다고 보기는 힘든 족적을 남겼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무리하게 남자 대회의 출전을 강행한 나머지 자신의 재능에 비해 초라한 커리어를 남기고 은퇴했다는 평이 지배적. 테니스에서는 여제 세레나 윌리엄스가 남자 테니스 세계 랭킹 203위 카스텐 브라쉬와 격돌한 기록이 있다. 세레나는 남자 200위쯤은 자신이 쉽게 이길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결과는 브라쉬의 일방적인 승리. 그 뒤 많은 하위 랭킹의 남자 선수들이 세레나에게 한 판 붙자고 도발했지만, 그녀는 승부를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이 인간이기 이전부터 중요하게 사용했던 능력일수록 타고난 재능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한다. 100m 달리기 같은 것이 대표적인데,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파충류와 비슷한 존재일 때부터 적자생존의 원칙으로 길러져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분야에서는 적어도 우리 생에서, 여성이 남성을 이기는 걸 보는 것은 불가능할 듯싶다.
그러나 인간이 비교적 최근에 발전시킨 능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쪽은 뇌의 바깥쪽 전전두엽 피질을 이용하는 능력들이 대부분인데, 뇌의 이 부위는 가소성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용불용의 영역, 품부의 재능보다는 미래의 노력이 중요한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난 이번에 최정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크게 아쉽지 않다. 그녀에게 또 모든 여성에게, 미래의 기보는 여전히 깨끗하게 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이번 생 안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녀장사'가 마지막 화살로 대마를 사냥하고, 끝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호걸 중에 정상에 서는, 그 신화를 넘어선 초유의 국면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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