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上)...거리 곳곳 폴 세잔의 흔적들…세잔이 사랑한 '물의 도시'

  •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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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02 08:30  |  수정 2023-11-24 08:43  |  발행일 2022-12-02 제36면
겨울에도 온천수 뿜는 미라보 광장의 '이끼분수'
세잔이 오후 4시쯤 들르던 '카페 레되가르송'
다양한 건축양식 조화 '생소뵈르 대성당' 압권
20세기 화가 작품 그득 '그라네 미술관' 거쳐
멜론 과육 베이스 디저트 '칼리송' 꼭 맛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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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엑상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로통드 분수.
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음 끄덕끄덕. 마지막 하나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인가? 그런데 세잔의 사과란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 모리스 드니는 세잔의 사과를 인류 역사를 바꾼 세 개의 사과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세잔의 사과는 그의 미술 세계를 엿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평범한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이 그린 사과는 껍질을 벗기고 싶지 않다. 또 그저 잘 그리기만 한 사과는 입에 군침을 돌게 할 뿐이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라고 했다. 궁금해졌다. 엑상프로방스는 그렇게 세잔을 뒤지다가 만난 도시이다.

아를에서 방향을 돌려 엑상프로방스를 향했다. 이 도시는 엑스(Aix)라고 불리는데, 라틴어로 물을 뜻한다. 'Aix-en-Provence'는 프로방스 지역의 물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생빅투아르 산의 바위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온천수로 인해 로마 시대부터 온천 마을로 명성을 떨쳤다. 동쪽으로 니스·모나코·칸·그라스, 서쪽으로 아비뇽·아를·몽펠리에, 남쪽으로 마르세유와 칼랑크 국립공원, 북쪽으로 베르동 협곡과 라벤더로 유명한 발랑솔 고원이 둘러싸고 있다. 인구가 14만명이 넘으니 프랑스 도시 가운데 꽤 큰 축에 드는 도시이다.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화가 폴 세잔의 고향이어서 세잔의 도시로 기억되곤 하지만, 12세기에는 프랑스의 주도였기에 사원, 성당, 궁전 등 역사와 문화 유적 등의 볼거리도 많다. 관광의 첫 시작은 보통 미라보(Mirabeau) 광장에서 시작한다. 물의 도시답게 거리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수를 만날 수 있다. '1천개 분수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로통드(Rotonde) 분수이다. 1860년에 세워진 이 분수는 농업·예술·정의를 상징하는 세 신과 천사, 인어, 백조, 사자 등이 조각된 멋진 조형미를 자랑한다. 로터리 가운데 자리한 이 분수를 기점으로 관광안내소, 미라보 광장, 올드타운, 프로방스 길 등 도시의 중요 장소들이 이어져 있다.

카페
세잔과 에밀 졸라가 단골로 다닌 카페 레되가르송.
엑상프로방스의 얼굴로 불리는 로통드 분수 앞으로 중심가인 미라보 거리가 펼쳐진다. 멋진 가로수가 늘어선 보행자 전용 거리로 각종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플라타너스 그늘을 따라 가게를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다 보면 큰 광장을 만난다. 미라보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또 1691년에 만든 '9개의 대포 분수'가 있다. 9개의 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붙은 이름이다. 이 분수의 물은 온천수여서 겨울에도 늘 이끼로 뒤덮여 있다. 그래서 '이끼분수'로도 불린다.

이 거리에는 꼭 들러야 하는 카페가 있다. 바로 폴 세잔과 그의 친구 에밀 졸라가 단골로 다니던 카페 레되가르송(Les Deux Garcons)이다. 카페 앞 녹색 차양막에는 '1792 Les Deux Garcons'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1792년 두 소년'이란 뜻으로 개업 연도와 두 셰프가 동업했다는 것을 나타낸 상호이다. 세잔은 이곳에서 에밀 졸라와 함께 미술과 문학, 정치와 혁명을 이야기하곤 했다. 세잔은 오후 4시쯤 이곳에 와서 느긋하게 와인 베이스의 식전 음료 아페리티프(aperitive)를 즐기곤 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 카페는 엑상프로방스를 방문하는 유명인사들이 꼭 들르는 장소가 되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물론 사르트르와 에디트 피아프, 알랭 들롱, 그리고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까지 숱한 유명인이 찾았다. 실내에는 피카소, 마티스 등이 그려 놓고 간 진품 그림들이 장식처럼 걸려 있다. 테이블이 다닥다닥 놓인 카페 테라스에 백발의 노부부와 젊은 대학생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이 중세와 현대의 조화처럼 이채로우면서도 신선하다. 역사적 장소가 발산하는 힘이다.

대성당
여러 양식이 복합된 생소뵈르 대성당.
카페 레되가르송에서 천천히 북쪽으로 걸음을 옮겨 골목 구경을 시작한다. 분수가 있는 작은 광장을 지나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 그리고 향긋한 빵집을 지나다 보면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고색창연한 생소뵈르 대성당(Cathedrale Saint-Sauveur)을 만난다. 이 성당은 1906년 10월22일 세잔의 장례식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이 성당은 엑상프로방스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 준다. 성당이 들어선 자리는 고대에 아폴로 신전이 있었고 로마 시대에는 공회당으로 사용됐으며, 기독교 공인 후에야 성당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5세기 무렵부터 천 년 넘게 증·개축되어 유럽 건축의 역사가 담겨있는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 입구의 문과 예배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벽체는 그리스 로마 양식이다. 또 중심 건물과 조각상은 고딕 양식이고 종탑은 바로크 양식이다. 로마네스크의 둥근 아치와 주랑이 고딕의 조각상과 첨탑, 바로크의 종탑 등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특히 성당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인 6세기부터 있었다는 성당 안의 세례당과 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둥근 돔 형태의 지붕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이 외에도 13세기 후반 프로방스 고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생장드말트 교회와 유명 화가의 종교화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마들렌 교회도 이 도시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전자는 13세기 후반의 프로방스 고딕 양식을 잘 보여주는 화려한 건축물이며, 후자는 13세기 후반까지 도미니크회 수도원 건물로 쓰였다가 17세기 대규모 재건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거듭났다.

건축물 유적으로는 350년이 넘는 세월을 간직한 방돔 공작의 별장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별장은 방돔 공작이 그의 연인을 위해 지은 곳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개방하고 있다. 3층의 정육면체의 건물에 잘 꾸며진 정원과 분수가 조화롭다. 특히 머리로 테라스를 이고 있는 문 양쪽의 아틀란티스 조각상이 시선을 끈다. 18세기 대저택에 들어선 미술관 코몽아트센터에서도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된 방과 아름다운 정원을 만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세잔, 고흐,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시계탑
엑상프로방스 시청사와 시계탑.
엑상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미술관은 그라네 미술관이다. 이곳 출신인 프랑수아 마리우스 그라네가 자신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그라네는 19세기 초에 로마에 머물며 주로 성당 내부의 광경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1838년 일반인에게 문을 열었고 폴 세잔이 엑상프로방스에서 그렸던 작품 정물화를 비롯하여 '목욕하는 사람들' '생빅투아르 산' 등을 볼 수 있다. 20세기에는 플랑크 재단의 후원을 통해 모네, 피카소, 장 뒤 뷔페 등의 작품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드가, 르누아르, 고갱, 고흐, 피에르 보나르, 파울 클레, 자코메티 등 20세기 유명 화가의 작품과 조각도 많다. 도시 규모에 비해 꽤 알찬 컬렉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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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맛봐야 할 특산품은 칼리송(Calissons)이다. 아몬드 가루, 말린 멜론 과육, 설탕 시럽과 달걀흰자로 만든 프랑스식 디저트이다. 칼리송에 얽힌 낭만적인 이야기도 재미있다. 1454년 9월에 결혼식을 올렸던 앙주의 르네(Rene) 왕과 여왕 잔느드라발(Jeanne de Laval)과 관련된 것이다. 왕은 당시 좀처럼 웃지 않는 그녀를 위해 궁정 제과사에게 결혼식 연회에서 그녀를 웃게 할 만한 특별한 과자를 부탁하였고, 제과사는 아몬드와 멜론, 오렌지와 같은 프로방스의 재료를 활용한 디저트를 만들었다. 이 디저트를 먹은 여왕은 마침내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를 본떠 아몬드 모양의 칼리송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엑상프로방스의 가장 유명한 칼리송 전문점인 '칼리송 뒤 로이 르네(Calissons du Roy Rene)'에 가면 수십 가지 맛의 칼리송을 만날 수 있다.

칼리송 하나를 입에 물고 이제 세잔을 만나러 간다. 아를이 고흐의 도시라면 엑상프로방스는 단연 폴 세잔(Paul Cezanne)의 도시이다.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잔은 줄곧 고향의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이 도시의 모든 풍경은 세잔의 캔버스에 담겨 작품이 되었고, 세잔은 자연스럽게 이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그의 자취는 보도에 'C'라고 새겨진 표지판으로 남아 우리를 이끈다. 로통드 분수 로터리에 그의 동상이 서 있고, 도시 곳곳에 세잔의 향기를 담은 장소가 있다. 그가 살았던 생가가 있고, 그림에 몰두했던 아틀리에가 있으며, 커피를 마시며 사색하던 카페가 있고,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성당도 있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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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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