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보는 음악' 새 지평 연 팝의 신화

  • 박미영 시인
  • |
  • 입력 2022-12-02 08:48  |  수정 2022-12-02 08:52  |  발행일 2022-12-02 제38면
'문 워크''린 댄스' 획기적 퍼포먼스 세계 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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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곱슬곱슬하고 커다랗게 부풀린 아프로 헤어(Afro hair)를 한 14세 소년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주제가를 부르고 있다. 변성기가 채 오지 않은 가늘고 앳된 목소리는 영화 벤(BEN)의 흥행 실패 따윈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다. 머지않아 팝의 황제, 세기의 슈퍼스타가 될 마이클 잭슨의 첫 솔로곡이다.

'Ben the two of us need look no more We both found what we were looking for ….' 지금 들어도 감미로운 노래의 가사는 운명 결정론적 측면으로 보면 예사롭지 않다.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해 외로움에 시달리던 소년이 쥐와 친구가 되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 영화 주제가와 묘하게 그의 일생이 오버랩 되니 말이다.

'문 워크''린 댄스' 획기적 퍼포먼스 세계 열광
빌보드 차트 핫 100 싱글 1위 최다 곡 보유자
기네스 세계 기록에 최다 수상 아티스트 등재
인종장벽 깨고 흑인의 사회 진출 선구자 역할
아동 성추행 등 많은 의혹과 루머 휘말리기도

마이클 잭슨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개리의 작은 집에서 9남매 중 일곱째 아이로 태어났다. 가정부였던 어머니 캐서린은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노래를 잘 불렀고, 아버지 조셉은 블루스에 심취한 철강 노동자였다. 이미 자신의 형제, 친구들과 함께 그룹 팔콘스로 활동한 이력이 있던 조셉과 캐서린은 아이들을 아주 엄격하게 키우지만,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밤마다 아이들과 고전 팝송을 연주했다.

1964년 조셉은 6세의 마이클을 재키, 티토, 저메인, 말론으로 결성한 잭슨 브라더스에 합류시켜 '잭슨 파이브'로 그룹명을 바꿔 데뷔시킨다. 물론 다섯 형제 중 막내였던 마이클이 낭중지추(囊中之錐)로 리드 보컬을 맡았다. 당시 롤링 스톤지(誌)는 마이클을 '신동' '압도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다' '가장 이목을 끌면서 빨리 알려진 리드 싱어'라고 묘사했으며, 당시의 잭슨 파이브에 대해선 '흑인 비틀스'라고 썼다.

하지만 조셉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강철주먹'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강압적이었고, 나중에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특히 마이클에게 정서적, 육체적 학대를 가했다. 그것은 공연 등으로 유년 시절을 아이답게 보내지 못한 마이클이 나중에 아버지와 일부 형제들과 절연하고 캘리포니아에 피터 팬의 동화 같은 네버랜드를 짓고 산 이유가 된다.

1971년 모타운 레코드에서 솔로 활동을 시작한 마이클은 이후 잭슨스로 이름을 바꾼 형제들의 그룹에서 탈퇴하고, 1979년 천재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Off the Wall'을 발매한다. 이 앨범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둬 그는 1980년대 대중음악계의 총아가 된다. 1982년 뮤직비디오 'Thriller'는 수록곡 'Beat It' 'Billie Jean' 'Thriller' 등으로 그동안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던 흑인의 소울과 R&B, 백인의 록과 팝을 융합한 예술 형식의 혁명을 불러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말 그대로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마이클 잭슨이 연 것이다.

그의 음악과 린 댄스, 문 워크 그리고 획기적인 무대와 영상 퍼포먼스 등은 TV 매체와 MTV를 통해 전 인류의 시선을 사로잡아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의 현상과는 또 다른 변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그것은 전 세계에 뿌리 깊은 병폐였던 인종 차별과 인종 장벽을 무너뜨려 특히 흑인의 성공적인 사회 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의 음악과 춤, 패션은 대중의 아이콘이 됨은 물론 타 장르 수많은 아티스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팝의 황제로 전 세계를 휩쓸어 1987년 음반 'Bad'는 수록곡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다이애나비가 가장 좋아했다는 'Dirty Diana'를 모두 빌보드 차트 핫 100 싱글의 정상에 올려 최다 1위 곡의 보유자라는 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그즈음부터 안타깝게도 어릴 적부터 앓아 온 백반증(vitiligo)이 그의 피부와 외모를 바꾸어 흑인과 백인의 경계를 허무는 또 다른 상징이 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악성 루머의 빌미가 되고 만다.

1990년대 'Black or White'와 'Scream'으로 그의 혁신은 계속되었고, 1993년 슈퍼볼 하프 타임 공연은 세기의 무대로 그 정점이 된다. 그러나 점점 그의 외적 변화와 개인적 인간관계, 소심함으로 인한 폐쇄성 등 사적인 부분은 많은 논란을 불러온다. 급기야는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기소되어 민사소송은 법정 외 합의로 종결되지만, 형사 수사는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된다. 2005년에도 또 그 혐의에 연루돼 재판을 받지만, 모든 혐의에 대해 최종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극심한 상처를 입은 그는 네버랜드를 떠나 로스앤젤레스 인근 거처를 마련했고, 2009년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 40년 동안 기네스 세계 기록에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아티스트로 등재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 앨범 'Thriller'의 6천600만장 이상 판매 기록은 유일무이한 역사로 남아있다. 또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꾸준히 빌보드 TOP 10에 든 유일한 가수, 솔로 경력 총 13개의 빌보드 1위 곡에 밴드 시절까지 합치면 17개의 빌보드 1위 곡을 남긴 가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 대부분이 그를 보며 느꼈던 것처럼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돈을 노리는 자들과 타블로이드판 황색 언론은 가열하게 소송을 걸고 악성 루머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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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어떤 수사를 동원해도 모자랄 만큼 독보적이었다. 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된 몇 안 되는 음악가 중 한 명이며,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13개의 상과 더불어 이미 35세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상했다. 2002년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 춤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팝과 록 뮤지션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국립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연예인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2009년 6월25일 'This Is It' 콘서트로 컴백을 준비하던 중 프로포폴과 벤조다이아제핀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LA 경찰은 주치의 머레이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고, 2급 살인죄로 2011년 9월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의 죽음은 VH1 선정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 1위로 꼽혔다. 슬하에 두 명의 부인에게서 얻은 남매와 대리모를 통해 얻은 아들 등 삼 남매가 있다. 묘지는 글렌데일의 포리스트론 공원에 있다.

2014년 미국 국세청은 그의 재산을 11억2천500만달러(1조2천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 유가족들에게 7억200만달러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는 생전에 자선단체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해 기부와 자선도 많이 했다. 주로 전쟁으로 인한 피해 지역, 불치병에 걸린 사람 치료를 위해 연예인 중에 가장 기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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