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의 텃밭 인문학] 끼니때마다 만들어 먹고 잔반은 거름으로 활용

  • 채형복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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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16  |  수정 2022-12-16 08:17  |  발행일 2022-12-16 제38면
식재료 텃밭서 자급자족하며 잔반 최소화

자극적 음식은 지양, 자연식 위주로 섭취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해야 '식구'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배고픔 때우기보다

한끼 식사 음미하며 영혼의 허기도 채워야

[채형복의 텃밭 인문학] 끼니때마다 만들어 먹고 잔반은 거름으로 활용
[채형복의 텃밭 인문학] 끼니때마다 만들어 먹고 잔반은 거름으로 활용
채형복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인)

저녁을 먹고 나서 강정을 만들었다. 아내는 주방장, 나는 보조 역이다. 용기의 크기에 맞게 조청과 설탕, 올리브유를 배합하는 것은 아내의 일이다. 나는 나무 주걱을 들고 기다렸다가 재료를 섞고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까지 젓는다. 적당한 때에 현미·보리쌀·땅콩·참깨와 같은 재료를 덖은 다음 편편한 판에 붓고는 고르게 펴고 밀어 딱딱하게 굳힌다. 이때 너무 오래 놔두면 굳어 칼로 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내가 세로로 길게 자르면 아내가 네모나 마름모꼴 예쁜 모양으로 작게 자른다. 강정뿐 아니라 견과류와 빵도 만들어 아침 식사로 먹기도 하고, 손님이 오면 간식으로 내놓기도 한다.

우리 내외는 가급적 집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외식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바깥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식당 음식은 보통 너무 맵고 짜고 단맛이 강하다. 채소 위주의 자연식에 길든 탓인지 먹고 나면 몸이 먼저 거부반응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김치를 비롯한 저장 음식을 제외하고 냉장고에 쟁여놓고 먹는 법이 거의 없다. 끼니마다 먹을 만큼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는 되도록 잔반을 남기지 않으려 애쓴다. 남은 음식이나 찌꺼기는 퇴비로 만들어 텃밭을 가꾸는 거름으로 뿌린다.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살고자 팔공산에 들어와 전원생활을 하며 텃밭 농사를 짓는다. 채소로 만든 식재료만큼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먹는 것'은 '사는 것'의 필요 전제조건인 셈이다. 먹는 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에게 이토록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음식의 의미에 대해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춘궁기를 거치면서 뇌리에 깊이 새겨진 배고픔에 대한 아픈 기억이 남아서일까. 식사할 때 음식을 천천히 즐기고 음미하기보다는 허겁지겁 해치우고 만다. 아직도 우리는 음식을 몸과 영혼을 살찌우는 고도의 문화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배고픔을 때우는 한 끼의 밥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자어로 식구란 먹을 식(食)자에 입 구(口)자로, 한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한집에 살더라도 밥을 함께 먹지 않으면 동거인이지 식구라고 할 수 없다. 그만큼 식구란 가정이란 울타리에서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에 방점이 찍혀있다.

한때 어느 정치인의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이 유행한 적 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으로 과로사가 빈발하는 나라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오랜 시간 일하는 나라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1천915시간으로 OECD 38개 회원국 중 다섯 번째로 높다. 한국인은 OECD 평균치보다 연간 199시간,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무려 연간 500시간 이상 더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에 더하여 살인적인 주거비에 시달리고 있으니 한국인에게 여전히 '저녁이 있는 삶'은 요원하기만 하다.

우리는 왜, 언제부터 가족이 오붓하게 한 끼 식사마저 편하게 먹지 못하고 이토록 현실에 쫓기듯 살고 있는가. 로켓배송, 총알배송, 당일배송이니 말만 들어도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속도와 편리로 포장된 자본주의에 언제까지 우리의 영혼을 팔아버릴 것인가. 그 끝을 모르는 경쟁과 효율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어야 이 야만의 폭주를 끝낼 것인가.

'밥은 먹었냐?/ 이 말은 왜 이리도 서러운가// 배부른 자본은 지천에 산해진미로 넘쳐나는데/ 밥이 오늘처럼 설운 적은 없었다// 밥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고/ 먹는 행위가 눈물의 저항이 되는 현실에서// 한 끼 밥은/ 누구에게는 굶어도 좋을// 누구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할/ 삶이자 생존이다.'(졸시 '밥은 먹었냐?' 부분)

예나 지금이나 밥은 생존의 기본조건이고, 현실정치를 좌우하는 민심의 잣대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묻자 맹자가 말했다. "일반 백성들로 말하자면, 일정한 생활근거가 없으면 그로 인해 일정한 마음도 없어진다." 그 유명한 맹자의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다. 위정자라면 마땅히 백성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 생업을 마련해줘야 한다. 배고파서 굶어 죽을 지경인데 인의도덕을 말한들 백성들에게 씨알이 먹힐 리 없다.

연이어 맹자가 말한다.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어도 일정한 마음을 갖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다." 맹자의 이 말은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스승 공자의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의 군자와 선비는 사회의 지배층 내지는 부유층이다. 공자와 맹자는 한목소리로 말한다. 사회지도자들은 일신의 배부름과 편안함을 구하지 말고 백성들이 겪는 삶의 애환과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한다. 로마 초기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된 말이다. 정치의 근본을 백성의 생업에 두고, 지배층으로 하여금 배부름과 편안함을 구하지 말라는 말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하여 나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하지 말고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지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자 그에 역행하는 세태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다. 자연에 묻혀 평생 농사꾼으로 살다간 전우익 선생은 말한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그가 펴낸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과도한 경쟁과 물질주의에 매몰된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있다.

어릴 적 시골에서의 삶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가난했다. 그래도 하루 삼시 세끼는 대가족이 함께 모여 한 방에 앉아 밥을 먹었다. 먹을 때는 큰소리로 떠들거나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엄숙주의 때문에 모두 묵묵히 밥만 먹었다. 식사는 마치 신성하고 근엄한 제례의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형과 누나는 동생을 서로 아끼고 배려하며 밥을 먹는 과정을 통해 가족 간의 따뜻한 정과 우애를 나누었다. 다 함께 밥을 먹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온통 내 자식과 내 가족의 출세와 안위에만 매달려 이웃이 겪는 고통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계 230개 이상의 국가 중에서 열 번째로 잘사는 경제대국이 되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배고픈가. 언제까지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는 삶을 살 것인가. 이제는 좀 더 적게 일하고도 경제적으로 보다 안정되고 정신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자본주의는 아귀와 같아서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른다. "이제 그만 여기서 딱/ 먹기를 멈추라// 비우라// 헛헛한 욕망의 위장"(졸시 '배설' 부분)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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