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7] 명나라 문징명…청빈하고 지조 있는 지식인의 삶…짜임새 있고 강건한 필치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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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03 08:04  |  수정 2023-02-03 08:05  |  발행일 2023-02-03 제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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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징명 글씨 '적벽부'(부분).

문징명(1470~1559)은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벽(壁)이고 자(字)가 징명(徵明)이었으나, 후에 이름을 징명으로 자를 정중(征仲)으로 바꿨다. 명대 문인화풍을 대표하는 오파(吳派·쑤저우의 옛 지명이 '吳')의 창시자 심주(沈周)의 가장 출중한 제자다. 화가이자 서예가이며 문학가.

서예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고, 그림은 심주에게 배웠다. 서단에서는 축윤명, 왕총, 진순과 함께 오문사재자(吳門四才子)로 부르고, 화단에서는 소주지역 출신인 심주, 당인(唐寅), 구영(仇英)과 더불어 오문사가(吳門四家)로 통한다.

문징명은 서예의 대가 이응정에게 글씨를 배우면서 스스로 왕희지, 구양순, 조맹부, 소식, 황정견, 미불 등과 같은 대가들의 서체를 습득하며 독창적인 서풍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다. 서예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용필법의 기초가 되고, 문인화가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지닐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해서, 행서, 예서, 초서, 전서 등 모든 서체에 능했다. 특히 소해(小楷·글씨 크기가 작은 해서체)에 뛰어났다. 문징명의 소해는 순수하고 정갈하며, 굳센 가로획과 세로획이 질박하면서 근엄하다.

그의 글씨는 짜임새 있으면서 필치가 강건할 뿐만 아니라, 고매한 성품과 함께 전형적인 문인의 풍취인 서권기(書卷氣)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징명은 하루에도 수차례 천자문을 쓰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서예가로 대성하게 되었다. 주화갱(朱和羹)은 그의 글씨에 대해 '명나라 해서 중에서 문징명이 제일'이라고 평했다.

관직생활을 한 부친 문림(文林)을 따라 유년시절부터 전국 여러 곳에서 생활하며 국사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문징명 자신은 과거시험에 10차례 낙방하여 54세가 되어서야 주변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한 문징명은 베이징에서 한림원대조로서 무종실록 편찬사업 등에 참여하며 관직생활을 했으나, 58세에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쑤저우로 귀향하여 자신의 여생을 문장과 서화에 바쳤다.

고상한 인품의 그는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청빈하고 지조 있는 지식인으로 살았던 그는 서화를 팔아 생활하면서도 왕족과 환관 외국인에게는 팔지 않았다고 한다.

명대 중기에 경제적 발달로 각 지역에서 다양한 화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도 쑤저우를 중심으로 활동한 오파는 송·원 이래의 문인화 전통을 계승하며 문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서예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90세로 별세하기 얼마 전까지도 파리 머리만 한 소해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일이다. 82세에 쓴 소해 '취옹정기(醉翁亭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1980년 저장성 난계(蘭溪)현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그가 1552년에 쓴 당룡묘비(唐龍墓碑)는 장편의 글을 해서로 썼는데, 글자가 사방 1㎝ 정도다. 83세의 고령으로 쓴 글씨여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

행초서 작품으로는 89세에 쓴 소식의 '적벽부'가 유명하다. 문징명이 유려한 행초서체로 쓴 작품이다. 1558년 문징명이 89세 되던 해 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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