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역사도시대구복원] 고려 역사 이야기 찾기…왕건길에 첨복단지·대통령생가·염색박물관 포함돼 취지 무색

  • 오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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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07 06:55  |  수정 2023-02-09 09:21  |  발행일 2023-02-07 제3면
고려 왕건 대구서 견훤과 전투
지역 곳곳 설화·지명 남겼지만
무관한 곳에도 테마 명칭 사용
고증 통한 체계적 정비 목소리
신숭겸 장군 유적지 사료 부족
국가 기념물 승격에도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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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구 지묘동 신숭겸 장군 유적지 뒤편으로 왕산(王山)이 우뚝 서 있다. 왕산은 견훤에게 대패한 왕건이 도망치며 넘은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영남일보 DB〉
만약 대구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코리아(KOREA)'로 불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구는 바로 코리아의 어원인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을 살린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 대구 곳곳에는 왕건과 관련한 숱한 얘깃거리와 관광자원이 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고증하려는 노력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어서 이와 관련한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지명에 담긴 태조 왕건의 흔적

태조 왕건은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건 운명의 한판 승부를 펼쳤다. 이른바 '동수대전(桐藪大戰)'이 치러지면서 대구에 무수한 역사적 지명을 남겼다.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 10년(서기 927년) 음력 9월 왕건은 신라를 유린한 후백제 견훤을 응징하기 위해 이들이 돌아가는 길목인 공산(公山) 동수에 군대를 주둔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후백제의 역공에 대패했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좌상 김낙(金樂)을 잃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대구 동구 평광동 시량이(실왕리)에서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고, 겨우 목숨을 유지해 앞산으로 피신한 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개성으로 도주했던 것. 당시 왕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담은 설화와 지명은 지금도 대구 곳곳에 남아 있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 군사들의 포위망을 탈출한 왕건이 잠시 앉아 쉬었다고 전해지는 '독좌암', 왕건의 군대가 견훤에게 무참히 패배함에 따라 붙여진 '파군재', 왕건으로 변장한 신숭겸 장군이 어가를 타고 적으로 돌진하다 전사했다는 '지묘(智妙)'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팔공산 일대에는 대왕재, 무태, 연경동, 왕산, 불로동, 초례봉, 안심, 반야월 등 왕건과 관련한 지명이 즐비하다. 또 앞산에는 왕굴·은적사·안일사·임휴사, 달성에는 왕선재 등 왕건 관련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태조 왕건에게 대구는 '은혜의 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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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장군 유적지에는 말을 탄 채 활 시위를 당기고 있는 '신숭겸 장군상'이 건립돼 있다. 동수전투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왕건의 목숨을 구한 장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영남일보 DB〉
◆왕건길·신숭겸유적지 부실 복원

이런 역사적 얘깃거리들을 바탕으로 대구에서는 왕건을 소재로 한 관광·문화 사업이 속속 생겨나고 있으나 이를 체계적으로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대구시는 2012년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동수전투 설화를 모티브로 팔공산 테마길을 조성했다. 용호상박길·열린하늘길·묵연체험길 등 8개로 총 35㎞ 구간에 조성하고, 길마다 왕건의 행적과 관련된 소재를 담아냈다. 하지만 왕건길만의 특색을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등산객 황모씨는 "왕건을 특색으로 한 테마길임에도 불구하고 등산로 주변에 노태우 대통령 생가, 자연염색박물관, 첨단의료복합단지 등이 포함돼 있어 본래의 왕건길 조성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며 "많은 이들이 왕건길을 걸으며 당시의 상황을 공감할 수 있도록 등산로 주변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구 동구 지묘동에 조성된 신숭겸 장군 유적지의 관리에도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 평산신씨 종친회에서 건립한 신숭겸 사당 충렬사와 파군재삼거리에 세워진 신숭겸 장군 동상 등 시설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를 대구시가 아닌 평산신씨 종친회에서 맡고 있어서다.

더욱이 신숭겸 장군 유적은 1982년 대구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가 2021년 11월 문화재청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면서 현재는 대구시 기념물로만 남아 있다. 종친회에선 신숭겸 장군 유적의 국가 기념물 승격을 바라고 있지만 역사 고증 부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평산신씨 종친회 신윤철 사무국장은 "대구시 기념물이라 일부 보수정비 예산과 계절별 공공근로 인력 등을 제외하곤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 기념물 승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고증할 만한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라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진행된 흔적 지우기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아쉬워했다.

◆고증 통한 단계적 개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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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대구팔공문화원장이 왕건 유적지에 대한 고증을 강조하고 있다. 〈대구팔공문화원 제공〉
일각에선 공산전투와 왕건 관련 유적지에 대한 체계화한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와 유적지 일대 상가 명칭 역시 타 지자체의 사례를 참고해 순차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컨대 신숭겸 장군 출생지로 알려진 전남 곡성군은 생가 복원을 비롯해 용산재 건립 등을 통한 '신숭겸 마케팅'에 적극 나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김성수 대구팔공문화원장은 "이순신 장군을 연상케 하는 지금의 신숭겸 장군 동상이 아니라 왕의 어의를 입고 공산전투에 나선 신 장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표현할 새로운 조형물이 필요하다"며 "주변 상가 역시 왕건 짬뽕, 공산 비빔밥 등과 같이 왕건을 떠올릴 수 있는 쪽으로 명칭을 통일한다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분별하게 차용되고 있는 '팔공산 왕건길'에 대한 개선도 촉구했다. 현재 대구에선 팔공산 왕건길을 비롯해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불로동 일대에 왕건길 조성사업이 진행 중이다. 김 원장은 "왕건과 관련 없는 길에도 모두 왕건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이는 시민이 역사를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며 "왕건과 관련 없는 길은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팔공산 곳곳에 남아 있는 '지명유산'과 관련해선 이야기 소재를 제대로 가공해 다양한 문화사업을 펼칠 것을 주문했다. 지명으로 스토리텔링하고 있는 곳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만큼 927년 공산전투 현장들을 잘 보존해 미래 먹거리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 김 원장은 "공산전투에서 새 왕조를 열었던 역사 기록은 향후 남북이 통일됐을 때 개성과 연계한 문화 교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며 "팔공산이 향후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때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어떻게 알리고 보존할지를 지역사회가 다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주석기자 farbrother@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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