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美 소설가 '허먼 멜빌', 선원시절 고됐던 바다경험이 소설 무대로

  •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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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03  |  수정 2023-03-03 08:43  |  발행일 2023-03-03 제38면

[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美 소설가 허먼 멜빌, 선원시절 고됐던 바다경험이 소설 무대로
소설가 '허먼 멜빌'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소설 '모비 딕' 中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소설 '모비 딕(Moby Dick)' 에이해브 선장의 독백이다. 허먼 멜빌의 이 소설은 1851년 10월 런던에서 '고래'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후 제목을 모비 딕으로 바꾸어 11월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백경(白鯨·흰고래)'으로 일본판 번역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소개되었다. 현재 모비 딕은 서구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허먼 멜빌은 에드거 앨런 포,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19세기 미국 소설가로 지칭된다.


이렇게 수많은 작가와 철학자 심지어 대통령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명작 모비 딕이 처음 출간되었을 땐 이 소설을 헌정받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 외에는 아무도 모비 딕에 주목하지 않았다. 1891년 일흔두 살의 나이로 멜빌이 죽을 때까지 소설 모비 딕은 미국에서 고작 3천200부 팔리는 데 그쳤고, 20세기 중반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싯 몸의 극찬을 시작으로 멜빌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재평가를 받게 되고서부터야 모비 딕은 'GAN(Great American Novel·위대한 미국 소설)'으로 줄여 부르는 등 전 세계인의 필독서가 된다.

허먼 멜빌은 1819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계와 모계 모두 명문가여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13세 때 무역상이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급사로 가세가 기울어 다니던 학교도 중단하게 된다. 1837년 경제공황 이후 점원, 농장 일꾼, 은행원, 토지 측량사, 교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스무 살이 되던 해 영국 리버풀로 내왕하는 상선 세인트 로렌스호 선원으로서 그의 소설 무대가 되는 바다 생활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13세때 父 사업 실패로 가세 기울어 학교 중단
청년시절 고래잡이배 승선 후 숱한 우여곡절
'타이피' 등 2개 작품 성공 후 본격 문학활동
결혼 후 출간한 소설 '모비 딕' 당시에는 외면
20세기 멜빌 부흥 운동으로 뒤늦게 인정받아

이듬해 여전한 불경기로 육지에서의 일자리를 찾지 못한 그가 다시 승선한 남태평양행 포경선 애쉬쿠넷호에서의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고된 것이었다. 거대한 고래를 고작 서너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보트로 추적하고 작살로 잡고 해체하는 원시적인 작업, 잦은 폭풍, 빈약한 음식과 질병은 스무 살 청년에게도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 게다가 선장과 항해사들의 무지함과 폭력은 가혹할 지경이어서 승선 18개월 만에 그는 동료 토비 그린과 함께 탈주해 버린다. 그때 마르키즈군도의 식인종 타이피족에게 잡혀 죽을 뻔하기도 하고, 1개월 만에 호주 포경선에 의해 구출되지만 그 배에서의 생활 또한 이전만큼 열악해 배가 타이티섬에 정박했을 때 다른 선원들과 함께 직무 거부를 해 투옥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 후 석방되어 근처 섬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다가 또 다른 포경선에 승선했다가 호놀룰루에 내려 점원으로 몇 달간 체류한다. 그러던 중 섬에 애쉬쿠넷호가 입항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미국 군함에 수병으로 자원입대해 복무한 뒤 1844년 10월 보스턴으로 귀환한다. 장장 3년 10개월의 이 경험은 그를 대 소설가로 성장할 밑거름으로, 후에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는 첫 소설 '타이피(Typee·1846년)'와 자전 소설 격인 '오무(Omoo·1847)'로 탄생된다.

그의 남다른 이 경험은 바다와 고래잡이에 대한 해박함은 물론 인종과 종교,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는 탈인식으로 그를 당대 미국의 청교도적 엄숙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이 탈식민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인식은 스물다섯 살에 쓴 첫 소설부터 마흔이 되기 전 절필한 뒤 거의 30년 동안 자신의 문학과 존재가 망각되는 것마저 지켜본 뒤 쓴 만년의 작품에까지 오롯이 담겨 그의 독창적인 사상과 철학이 되었다.

1844년 25세 청년이 되어 뉴욕에 돌아온 허먼 멜빌에게는 다행히 경제적으로 나아진 집안 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 겐스부어트는 당시 대통령인 포크의 측근으로 런던 공사관 서기가 되었고 동생 엘런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여유를 가진 가족의 응원으로 그는 자신의 이국 체험과 바다에서의 모험담을 써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연이은 두 번째 책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그는 매사추세츠 대법원 판사이자 아버지의 절친 러뮤엘 쇼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뉴욕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다만 그 책 '타이피'와 '오무'로 여행기 작가로 문학계에 인식된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그 유명세로 당시 청년 미국(Young America)이라 불리는 문학운동 집단과 친교를 맺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일찍이 무지막지한 사실의 세계를 경험한 그는 마치 습자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책으로의 여정을 꾀했다. 셰익스피어, 단테, 몽테뉴, 라블레, 토마스 브라운, 코울리지를 탐독하기 시작한 그에게 문학운동 동료인 다익킹크의 방대한 장서는 그의 해부학적 창의성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때 나온 책이 당시 가장 첨예한 정치 이슈였던 노예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마디(Mardi)였다. 그러나 이 책은 비평가들에게 외면을 당했고 결과는 책의 판매 실적 저조로 인한 수입 감소였다. 이것은 당연히 막 첫아들 맬콤을 얻은 직후인 그에게 대중성과 쓰고 싶은 글 사이의 갈등을 불러왔다.

생계를 위해 '평범하고, 사실적이고, 재미있는' '형이상학적 굴곡이 없는' 대중적인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 그는 '레드 번'을 발표하고 '화이트 재킷' 원고를 들고 런던과 파리, 브뤼셀, 쾰른 등을 여행하고 자신의 평생에 걸친 문학적 지지자인 너새니얼 호손을 만났다. 이후 아들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여행을 단축하고 돌아와 피츠필드의 농장 애로우 헤드로 이사해 그곳에서 심혈을 기울여 글을 썼다.

책은 1851년 10월 런던에서는 '고래'라는 제목으로, 11월 미국판에선 '모비 딕'으로 출판되었다. 고래와 고래잡이의 모든 것, 광포한 바다에 맞서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통찰을 모두 담은 책이었다, 하지만 최초 비평은 좋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에 대한 작가의 자유분방한 태도를 비난하는 부정적인 평은 늘어갔다.

[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美 소설가 허먼 멜빌, 선원시절 고됐던 바다경험이 소설 무대로
박미영 시인

책은 팔리지 않았고, 후원자였던 다익킹크의 서평마저 비판적이었으며 그는 분노하고 절망했다. 다만 명작임을 감지한 호손의 이해와 격려만 유일했다. 이후 10여 년간 '필경사 바틀비' '피에르' '이스라엘 포터' 등을 발표하고 순회강연을 시도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1866년 남북전쟁을 멀리서 지켜보며 쓴 시집 '전쟁시편'이 출판된 직후 마흔일곱 살의 멜빌은 뉴욕 세관의 부검사관으로 취직을 했다. '고정급을 받을 수 있는 공직'이었다. 이듬해 큰아들 맬콤의 권총 자살 사건을 제외하면 1885년 퇴임할 때까지 멜빌의 생활은 평탄했으나 문학계에서 그의 존재는 잊혀갔다.

1891년 산책길에서 얻은 감기가 악화되어 9월28일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신문 부고란엔 '문단 활동을 했던 한 시민'으로 이름과 모비 딕의 철자도 틀리게 기재되었다고. 1919년 멜빌 탄생 100주년 부흥운동(Melville revival)으로 재평가가 이뤄질 때 2남 2녀의 자식 중 둘째 딸 프린세스만 아버지의 영광을 지켜볼 수 있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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