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대구에 찾아온 '이건희 컬렉션'…레이스 달린 노란옷에 다리 꼰 포즈 '20세기 트렌드세터'

  •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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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10  |  수정 2023-03-10 08:15  |  발행일 2023-03-10 제36면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대구에 찾아온 이건희 컬렉션…레이스 달린 노란옷에 다리 꼰 포즈 20세기 트렌드세터
이인성,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 (종이에 수채, 73.5×58.5㎝, 1934, 대구미술관 소장)
바이올린 선율이 미끄럼을 탄다. 베토벤의 '로망스' 제1번 G장조가 차 안을 물들인다. 남성적이며 서정적이다. 차창 가득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진다. 훈훈한 바람이 분다. 대구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웰컴 홈: 개화(開花)' 특별전(2.21.~5.28.)이 열리는 첫날이다. 미술관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봄바람처럼 나풀거린다. 한 컬렉터의 안목이 가슴을 뛰게 한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대구에 찾아온 이건희 컬렉션…레이스 달린 노란옷에 다리 꼰 포즈 20세기 트렌드세터
서동진, '자화상',(종이에 혼합매체, 33×24㎝, 1924, 대구미술관 소장)
◆이건희 컬렉션 속 서동진의 '자화상'

전시는 서동진(1900~1970)의 '자화상'을 시작으로 우리 근대와 현대 작품들로 꾸며져 있다. 이중섭(1916~1956), 유영국(1916~2002), 박수근(1914~1965) 등의 서양화가와 동양화가인 노수현(1899~1978), 김기창(1913~2001), 박래현(1920~1976) 등 우리 근현대미술사에 자리 잡은 작가들의 걸작이 망라되어 있다. 이는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실물로 만나는 자리이자 한 걸출한 컬렉터의 안목과 알찬 컬렉션이 선사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자리다. 출품작 중에는 대구 출신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어 은근히 자부심을 갖게 한다. 관람은 전시된 작품 순으로 봐도 되지만, 대구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보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유익한 관람 요령이 된다.

먼저 대구 근대화단의 맏형격인 서동진부터 보자. 1918년 계성학교에 입학한 서동진은 대구에 처음 서양화를 도입한 독립운동가 이상정(1897~1947)에게 미술 지도를 받는다. 일 년 후, 3·8대구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퇴학을 당한다. 경성으로 상경하여 휘문고보(현 서울 휘문고)에 재입학한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1호 서양화가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운다.

1924년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2년여간의 유학을 마친다. 귀국하여 대구 교남학교(대륜고 전신)에서 1926년부터 14년간 후학양성에 힘을 쏟는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4회나 입상한다. 대부분 대구의 거리와 마을 풍경을 그려서 1920~30년대의 대구풍경을 엿볼 수 있다.

1927년 '대구미술사'를 설립하여 서양화를 전파한다. 이인성(1912~1950)과 김용조(1916~1944) 등 대구 출신 화가들을 가르쳤고, 서양화 단체인 '영과회'와 '향토회'에서 활동했다. 1924년에 그린 '자화상'은 스타일이 신문물을 받아들인 도시적인 남성이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이마를 훤하게 드러냈다. 인물의 전형적인 3분의 2 면상을 취했다. 짙은 눈썹과 활기찬 눈망울이 화가의 부푼 꿈을 보여준다. 흰 와이셔츠에 연두색 나비넥타이를 하고, 연노랑의 양복을 입었다. 배경은 인물 시선에 양복의 색채와 비슷한 밝은 노랑과 주황색으로 처리했다. 뒷배경은 인물을 부각하기 위해서 짙은 고동색을 사용하였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대구에 찾아온 이건희 컬렉션…레이스 달린 노란옷에 다리 꼰 포즈 20세기 트렌드세터
서진달, '누드', (캔버스에 유채, 80.4×53.4㎝, 1938, 대구 미술관 소장)
◆서진달의 '누드'와 이인성의 노란 옷 여인

서동진과 나란히 전시된 작가는 서진달(1908~1947)이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부터 1942년까지 동경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 유화과에서 서구 인상주의와 아카데미즘의 영향을 받는다. 조선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입상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유학을 마치고 대구로 온 서진달은 계성중에서 변종하, 김창락, 추연근, 김우조 등 후학을 양성한다. 그는 서양화 단체인 '향토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림은 인물화와 풍경화, 정물화 등을 그렸는데, 인물화는 당시 유행하던 서구의 인물이 아닌 조선의 여인상을 그렸다.

그의 '누드'는 옆모습의 여인이 당당하게 서 있는 작품이다. 미끈한 체형의 여인이 아닌 강인한 조선의 여성이다. 머리에 한 손을 올리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근육을 거칠게 표현했다. 한쪽 가슴과 볼록한 아랫배를 과감하게 노출하되 다리는 안정감 있게 채색했다. 강한 붓 터치와 색채에서 여인의 강인한 면모를 느끼게 한다. 여인이 서 있는 바닥은 짙은 채색에 모서리로 구분하여 공간의 변화를 꾀했다. 벽의 색조가 밝으면서도 차분하다.


이인성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 산뜻한 수채화
주황색 의자·녹색 실내화…뛰어난 색채감각
서동진 '자화상' 신문물 수용한 청년의 자세
짧은 머리에 서양풍 양복 입은 도시 남성상

서진달 '누드' 강인함 돋보이는 조선 여성상
강한 붓 터치로 가슴과 아랫배 과감히 노출
이쾌대 '항구' 배 서너척 우람하게 정박한 모습
붉은 석양에 물든 바다 서정미 넘치는 어촌정취



대구가 낳은 또 한 사람은 '천재 화가' 이인성이다. 열여덟 살에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1929)에 첫 '입선'하고, 마지막 회인 제23회(1944)까지 연속 출품하여 스타 작가가 되었다. 제14회 출품작인 '경주의 산곡에서'(1935)는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는 쾌거를 선사한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그림 수업을 받고, 1935년에 귀국한 그는 대구에 후진 양성을 겸한 '양화연구소'를 차렸다. 해방 후 서울로 이주했지만 1950년 뜻밖의 사고로 일찍 생을 마쳤다.

이인성의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은 1934년에 그린 수채화다. 모자를 쓰고 한쪽 손은 의자 걸이에 얹고, 다른 쪽 팔을 올려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 늘씬한 여인은 다리를 꼬고 앉아 먼 곳을 향한다. 주황색 의자에 노란색 옷을 입은 여인은 녹색 실내화를 신었다. 노란색 과일이 탁자에 올려져 있고, 벽은 녹색과 옅은 노란색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분위기가 부드럽다. 의자의 주황색과 실내화, 벽 아랫부분의 녹색이 산뜻한 감각을 더한다. 멋스러운 레이스가 목과 소매에 장식되어 유행하는 의상을 보여준다. 시대를 앞서가는 트렌디한 여성상이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대구에 찾아온 이건희 컬렉션…레이스 달린 노란옷에 다리 꼰 포즈 20세기 트렌드세터
이쾌대, '항구', (캔버스에 유채, 33.5×44.5㎝, 1960, 대구미술관 소장)
◆이쾌대의 '항구'와 변종하의 '두 마리 고기'

이쾌대(1913~1965)는 경북 칠곡에서 대지주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구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고보에서 미술교사인 장발(1901~2001)을 만나 미술에 입문한다. 유갑봉(1914~1980)과 결혼 후 일본으로 가서 제국미술학교에서 학업을 연마한다. 1939년 일본에서 돌아온 이쾌대는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가미된 화풍을 구사한다.

그는 주로 인물화에 몰두했다. 탄탄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인물의 사실감은 물론 감정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또한 독립운동가이면서 언론인, 화가, 한학자였던 형 이여성(1901~?)의 영향을 받은 이쾌대는 조선적이며 민족적인 경향의 작품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념의 정체성이 빚어낸 극도의 혼란기를 맞아 6·25전쟁 후 월북하고 만다. 1988년, 월북화가 해금 조치로 이쾌대의 수많은 걸작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항구'는 인물이 아닌 바닷가에 정박한 배를 그린 작품이다. 붉게 물든 석양이 파도에 일렁인다. 조업을 떠났던 배들이 항구로 돌아온다. 넉넉한 저녁이다. 빛을 표현한 색채에 붓의 터치가 신선하다. 어부의 숨결이 피어나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그는 저녁이 주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서 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비교적 후배 화가로는 변종하(1926~2000)가 있다. 변종하는 대구 계성중에서 서진달에게 서양화를 배웠다. 1942년 만주 신경시립미술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광복을 맞아 귀국한다. 서울에서 작품 활동하며 홍익대에서 강의를 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연속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되는 영예를 안는다. 1960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소르본느대학에 다니며 주로 일그러진 인물을 풍자한 '설화적 상형주의'의 작품을 추구했다.

1987년 뇌경색으로 쓰러졌지만 투병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가 주력한 작품세계는 한국적인 이미지의 표현이었다. 전통적인 소재에 오브제를 오려 붙이거나 볼록 튀어나오게 제작한, 부조 같은 조형성이 두드러진 요철회화(凹凸繪畵)였다. 이 특별한 조형 방식 외에도 우리 민족 특유의 시적인 정서를 부각한 작품세계로 주목을 받았다. '두 마리 고기'는 매화와 고기가 바다를 유영하는 작품이다. 분홍 꽃이 장식된 노란색 화면 안에 검은색 물고기는 자유롭다. 꽃들이 피어 낙원을 만든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낙원이다. 그 낙원은 마음속에 있음을 작가는 알았을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을 빛낸 대구의 구상화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대구에 찾아온 이건희 컬렉션…레이스 달린 노란옷에 다리 꼰 포즈 20세기 트렌드세터
김남희 (화가)
이렇게 톺아보니 모두 구상화들이다. 그렇잖아도 대구 근대미술은 구상화가 강세로 꼽혔는데, 우연히도 이건희 컬렉션 속의 대구 출신 화가들 작품도 구상이거나 구상성을 띠고 있다. 서동진의 도시적인 인물과 서진달의 누드화가 그렇고, 이인성의 세련된 여인과 이쾌대의 기교 넘치는 붓 터치와 색채 구사도 대구의 구상화를 탄탄하고 유명하게 만들었다. 현대적인 조형성을 추구한 변종하의 작품 역시 대구 특유의 구상성를 바탕으로 도약했다.

이들 우리 근대미술의 기둥이 된 화가들 덕분에 이건희컬렉션이 더 알차고 의미 있다. 한 컬렉터의 눈 밝은 수집으로 우리는 큰 수고 없이 명작들을 한꺼번에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봄볕 같은 미술 로맨스에 내 마음도 활짝 개화한다. 바야흐로 봄이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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