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그단새] 백석 시집 '사슴'을 도쿄에서 만난 날

  •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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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07  |  수정 2023-03-07 06:52  |  발행일 2023-03-07 제23면

[안도현의 그단새] 백석 시집 사슴을 도쿄에서 만난 날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백석은 윤동주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동주는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읽고 매료되어 '별 헤는 밤'을 썼다. 이 두 편을 비교해 읽어보면 백석에 대한 윤동주의 문학적인 흠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된다. 이십 대 초반부터 나도 백석의 '찐팬'이었다. 그래서 백석을 흉내 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그리고 '백석평전'을 썼다.

'백석평전'의 일본어판이 출간되어 마련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달에 도쿄를 다녀왔다. 도쿄에 간 김에 번역자 이가라시 마키씨의 안내로 백석 시인이 유학했던 아오야마학원을 방문했다. 백석은 1930년부터 4년간 이 대학의 영어사범과를 다녔다. 우리 일행은 백석의 학적부와 신상조사서 같은 재학 시절 서류를 열람하기 위해 작은 세미나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백석과 관련된 복사물과 자료집들이 열댓 가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 놓여 있던 백석 시집 '사슴'을 나는 처음에 영인본으로 생각하고 무심코 뒤적거렸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 손끝은 떨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936년 1월20일 경성의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된 '사슴' 한 권이 바다 건너 일본 열도로 건너가 있었던 것이다. '사슴'은 우리 한지를 여러 겹 붙여 도톰하게 표지를 만들었고 내지와 본지는 한지를 접어 이른바 자루매기 방식으로 고급 제본을 했다.

2014년 한 경매에 나온 이 시집 한 권은 7천만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백석은 이 시집을 조선일보 기자면서 문학평론가였던 친구 이원조에게 자필 사인을 해서 주었다. 이육사의 친동생인 이원조는 1947년 말에 월북했다가 6·25전쟁 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사람이다. 시집의 주인이 월북한 뒤에 어느 고물상이나 고서점을 떠돌다가 가까스로 귀한 몸이 된 시집.

현재 국내에는 몇 군데 도서관과 문학관 그리고 개인 소장자가 '사슴'을 가지고 있는데 10권이 채 되지 않는다. 대출은 불가능하며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나는 운 좋게 두 군데 문학관에 간청해서 '사슴'을 손으로 만져보고 책 냄새를 맡으면서 촬영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시집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때가 묻고 빛이 바랜 상태였다. 그런데 아오야마학원 소장본은 마치 금방 인쇄소에서 나온 것처럼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날 아오야마학원 관계자에게 이 시집이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금방 답을 알려주었다. 1936년 2월22일 기증자 백석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 백석은 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자신의 모교로 우편 발송을 했을 것이고, 한 달 가까이 걸려 도쿄에 도착한 '사슴'은 87년 만에 우리에게 발견된 것이다. 이 시집이 한국에서 얼마나 희귀한 책인지 대학 측에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에서는 1억원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울 거라 했더니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987년 당시 영남대 교수였던 이동순 시인이 '백석시전집'을 낸 이후 우리나라 독자들은 백석의 시에 열광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가장 많은 시가 실린 시인, 석박사 학위논문으로 가장 많이 다룬 시인이 백석이다. 나는 자주 농담처럼 말한다. 백석의 시를 안 읽어보셨다고요? 그의 시를 한 편이라도 읽은 뒤에 다시 만납시다.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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