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일본 오사카 (2)

  •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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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4 08:25  |  수정 2023-03-24 08:26  |  발행일 2023-03-24 제36면
대형사찰 등 현지 곳곳에 서린 한반도의 발자취

오사카에는 한일교류와 관련된 흔적도 적지 않다. 고대 한일 교류사의 중심에는 일본인이 가장 추앙하는 쇼토쿠 태자가 있다. 쇼토쿠 태자는 7세기에 일본을 통치하면서 고대 일본의 정치체제를 확립한 것은 물론이고,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적 통일까지 이룬 인물이다. 1930년 100엔 지폐를 시작으로 모두 일곱 차례나 지폐 도안 인물로 쓰일 정도로 일본의 정신적 지주이다.

도심에 자리한 사찰 '시텐노지' 日 불교 구심점
  기와·일직선상 가람배치 등 백제 양식 빼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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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텐노지 오층탑

쇼토쿠 태자의 어머니는 백제계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독실한 불교 신자로 고구려 혜자와 백제의 혜총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태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기술자들을 대거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남아 있는 시텐노지(四天王寺)를 지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 사찰은 대부분 도심에 자리 잡고 있다. 도톤보리 동남쪽 덴노지구에 위치한 이 절 역시 오사카 도심에 있는 대형 사찰로서 일본 불교의 총본산이다. 으레 사찰은 산속에 있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첫인상이 매우 강렬했다. 사찰을 찾아간 날은 마침 주위에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각종 골동품과 기념품, 먹거리가 어우러져 사찰 주위를 에워쌌다. 인파 너머로 거대한 5층탑이 우뚝 솟아 있어서 멀리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서 직접 마주하니 규모도 거대하지만 건축미도 빼어났다. 이 탑이 바로 백제 기술자들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593년에 건립된 이 절은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1971년 재건한 것이라 과거의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곳곳에 고대 한반도와의 교류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선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늘어서 있는 가람배치는 일본에서 '시텐노지 양식'이라 불리지만 사실 백제 양식이다. 특히 백제 군수리 절터와 탑과 금당 간의 거리를 비롯해 각 건물 비례까지 일치하며 기와도 똑같다. 백제의 기술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절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대웅전에 해당하는 금당 뒤편의 '무대강(舞臺講)'이라는 곳이다. 이것은 돌로 만든 무대여서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사실 고대 한일문화교류의 상징 같은 곳이 아닐까 한다. 이 무대가 바로 백제의 예술가 미마지(味摩之)가 기악무(伎樂舞)를 가르치고 공연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곳 무대강에서 매년 '왓소 마쓰리(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 축제는 한반도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던 환영의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한국어의 '왔소'에서 유래됐다. 1990년부터 해마다 11월에 열리는 이 축제는 한반도와의 문화교류를 기념하는 행사이다. 왕인 박사를 비롯해 탐라,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 조선 등에서 도래한 수행행렬과 사절단을 맞이하는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가장행렬을 펼치고 공연도 한다. 이 행렬이 지나가면 길가의 수많은 인파는 우리말 '왔소'에서 비롯된 '왓쇼이! 왓쇼이'를 외친다.

쇼토쿠 태자가 이처럼 한반도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일본 사람이 신으로 받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 침략의 역사를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 최초의 통일 군주로서 그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오사카성을 축조했다. 도요토미는 1583년 수운이 편리한 우에마치 대지에 오사카성을 만들고 그 중심에 금박의 기와와 금장식을 붙인 호화로운 망루 천수각을 완성하여 권력자의 권위를 마음껏 과시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조선을 침략하여 동아시아 패권의 야욕을 드러냈다.

'오사카성' 도요토미 권력욕 과시 위해 축조
  과거 우리 민족 대거 동원해 지은 전쟁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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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 천수각

오사카의 랜드마크로 꼽히는 오사카성은 이처럼 도요토미의 권력욕이 만들어낸 바벨탑이다. 특히 주위에는 우뚝한 천수각의 높이만큼 근대 우리나라와 관련된 가슴 아픈 흔적이 즐비하다. 우리는 오사카성 주변의 다크투어를 위해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하는 츠카사키 마사유키(塚崎昌之) 선생의 가이드를 받기로 했다. 그는 '오사카성 부근에 남겨진 근대 한일 관계의 상흔'(2008), '스이타(吹田)의 전쟁유적에 대해서'(2020), '오사카공습과 조선인, 그리고 강제연행'(2022) 등 일본의 전쟁 범죄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재야 사학자이다. 두툼한 스크랩북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그의 모습은 웅장한 오사카성의 기세에도 눌리지 않는 강한 눈빛의 소유자였다. 깡마른 체구에 일본 특유의 겸손함과 완고함을 동시에 지닌 인상이었다. 그는 일본이 벌인 전쟁의 참상을 지역과 도시, 교육, 평화의 관점에서 연구, 조사하여 시민에게 알리는 시민 강습회 모임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 강습회에는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과 언론인 10여 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관련 지역 답사를 하고 있었다. 이날 답사에 동행한 두 젊은이도 마이니치방송과 아사히신문 기자였다.

우리는 당연히 천수각부터 오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단호했다. 오히려 지금의 천수각은 볼 것 없는 가짜라고 말하며 피식 웃는다. 실제 오사카성과 천수각은 권력 다툼 과정에서 소실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천수각은 1931년에 중건한 세 번째 천수각이다. 그리고는 사람이 찾지 않는 오사카성 뒤쪽 성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천수대 돌담 폭격 터였다. 이 주위에 포탄을 만드는 포병공창이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집중적인 포격을 당했다고 했다. 이어서 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포병공창 터로 안내했고, 스크랩북을 펼쳐 당시의 관련 기사와 옛 사진, 지도 등을 펼쳐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곳은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핵심지역으로, 오사카 국방관터, 제4사단 사령부 청사, 위수형무소 터 등이 인접해 있다.

사실 오사카성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 성의 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부터 세계대전까지 일본의 전쟁기지가 이곳이 아닌가! 도요토미를 모신 도요쿠니신사도 이곳에 있다. 그 뒤편은 또 윤봉길 의사가 수감되었던 오사카육군 위수형무소 터이다. 일본은 이러한 군사시설 건설에 우리 민족을 대거 동원하였으니 우리를 치는 칼을 우리 손으로 만들게 한 것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든 넓은 공원이 당시 동양 최대의 오사카 포병공창이었고, 그 옆으로 국방관과 제4사단 사령부 건물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역사를 기록한 공원 안의 표지석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알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침략전쟁에 동원된 우리 민족의 역사기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오사카 포병공창은 35만평에 달하는 대규모 군수물자 생산공장이었기에 미국은 50여 차례나 공습하여 인근을 초토화했다.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아무도 살지 못하게 돼버린 이 폐허에 강제 동원되었던 우리 민족이 흘러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그것이 재일동포의 집단 거주지인 이른바 '아파치 마을'이다. 아파치 마을은 현재 진행형의 아픈 역사이다. 츠카사키 선생은 조심스럽게 우리를 그 마을로 안내했다.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 '아파치 마을' 슬럼가 연상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남겨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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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너머의 아파치마을.

일본은 왜 하필 '아파치'라고 불렀을까? 궁금해하는 내게 선생은 아메리카 원주민 아파치처럼 약탈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붙였다고 했다. 미국 개척시대 이민자의 원주민에 대한 시각이 그대로 적용된 용어였던 것이다. 그랬다. 그들이 의미한 '아파치'는 도둑이었다. 당시 초토화된 병기 공장에서 고철을 캐내 파는 게 이 마을 주민의 거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일본 정부는 국유재산이라는 이유로 고철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았고, 고철을 품고 강을 건너던 조선인이 경찰 단속 때문에 물에 빠져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일본은 이곳에 살던 재일동포를 '아파치족'이라 부르며 감시하고 탄압했다. 선생은 비닐 코팅된 스크랩북을 펼치며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과 신문기사 등을 보이며 열정적으로 당시의 참상을 설명했다. 이곳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 슬픈 마을'로 묘사한 정용일 기자(한겨레21)는 "아파치 마을은 존재하되 아는 이는 없는 그런 마을이었다"며 마을을 찾기 위해 오사카성 주변을 몇 차례나 맴돌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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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그러나 우리 일행은 이 방면의 전문가 츠카사키 선생 덕분에 마을 어귀 먼발치에서 사전 설명까지 듣고 그 마을로 들어갔다. 그 마을은 마치 접근하지 말라는 듯이 옆으로 강을 끼고 철길이 가로막고 있었다. 큰 도로에서 허름한 철제 계단을 타고 철교 아래를 통과했다. 마을 바로 앞으로 네코마강이 흐르고 있었다. 마을을 두른 철길과 강둑이 세상을 구분 짓는 담장 같았다. 선생은 이 마을을 지날 때 주민과 눈을 마주치지 말고 말도 걸지 말라고 당부했다. 허름한 판잣집에 억지로 얹은 이층집들이 얼핏 봐도 상업도시 오사카와는 어울리지 않는 마을이었다. 강둑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뒤쪽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들렸다. 뒤돌아보니 초로의 할머니가 우리를 향해 뭔가 불만 섞인 항의를 하고 있었다. 선생은 쳐다보지 말라며 묵묵히 앞장서 걸었다. 그 할머니의 고함이 숙지고 나서야 선생은 이곳 마을 사람들은 이처럼 이방인에 대해 매우 예민하다며 여러 측면에서 핍박당해 왔고, 지금도 소외되고 무시되는 지역이어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섣부르게 동포심을 발휘해 동정 어린 시선이나 말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한때 180가구가 넘게 살아서 골목길 지나다니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다는 이곳이 지금은 폐허처럼 적막하다. 사과와 배상은커녕 '아파치 마을'이라 부르며 화려한 오사카의 그늘 속에 숨겨 놓았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여전히 아파 보인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하지만 잊혀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계속)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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