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초현실적인 나의 골목

  • 권기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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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7 08:02  |  수정 2023-03-27 08:04  |  발행일 2023-03-27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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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덕 (시인)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기형도(1960~89)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시작(詩作) 메모 중 일부분이다. 거리의 상상력은 왜 그토록 고통이었을까? 요절한 시인을 떠올리며 봄빛으로 가득해진 창문을 바라본다. 무작정 거리를 걷고 싶어진다. 걷다가 은은한 불빛이 보이는 어느 가정식 백반집에 들러 밥 한 그릇을 비우면 다시 걷고 싶어진다. 일상이라는 벽에 균열이 생겼을 때, 낯섦이 필요할 때, 골목이 보이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갑겠다. 골목 모양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고, 쓸쓸해 보이지만 정겹다. 필자는 거리에서 뻗어간 골목을 더 사랑했다.

1970년대생인 필자는 태생적으로 골목 또한 집의 영역이었다. 집에서 나는 최초 아기의 울음소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생명 탄생의 신호탄이었다. 또한 조등이 걸린 집에서 죽은 자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것 또한 이곳을 통해서였다. 어린 시절 나를 키운 것의 팔 할은 골목이었다. 동네 골목에서 잔뼈가 굵어진 소년들은 학교에서 익힌 지식과는 다른, 보다 유연한 흐름을 체화할 수 있었다. 특히 집과 집 사이를 이어주는 담벼락을 따라, 옥상과 옥상을 건너, 새롭고 낯선 그곳에 도달하는 방법과 지혜를 터득했던 것 같다. 길은 꼭 바닥에 있지 않았다. 대칭적이거나 균형적인 공간에 갇히지 않는 상상력,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우곤 했다.

이기성 시인의 시 '골목'은 "햇빛을 꽉 물고 있는 골목의 반은 컴컴하다."로 시작한다. 골목에는 봄날도 있고, 겨울도 있으며, 행복과 아픔의 시간들이 뒤섞여 창조적 공간이 된다. 어떤 몸이 되어간다. 초현실주의 연구가인 미셸 카라수는 "초현실주의가 궁극적으로 영원한 창조와 발명 상태에 있는 재통합된 인간을 추구한다"라고 했는데 어쩌면 필자 또한 골목의 변화무쌍한 변화와 소리들, 골목의 하늘과 환상의 몸짓들, 그 속에 녹아있는 삶의 파편들이 콜라주 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포비든 앨리'라는 TV 프로그램도 있듯이 '사라져 가는 숨겨진 골목'이 많아졌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옛 골목을 산책하는 것은 탐험적이며 초현실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여전히 낯선 발견과 고통까지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담과 담(譚)이 이어진, 거리의 상상력을 가진 기형도 시인처럼 말이다.

권기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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