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는 병

  • 정연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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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8 07:47  |  수정 2023-03-28 07:52  |  발행일 2023-03-28 제17면

정연지_증명사진
정연지 (작가)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보면, 어머니는 집 앞 신천을 두고 고향 경북 청도를 떠올리곤 하셨다. 산을 배경으로 두고 마을과 가까운 곳에 흐르는 신천의 풍경은 어머니가 유년을 보낸 옛집 앞의 청도천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신천은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방아쇠가 되었다.

화가에게도 추억은 그 자체로 작품 영감이 되고 고향 풍경은 주요 소재가 된다. 한국화의 대가 남천 송수남도 수평선이 주는 편안한 느낌을 통해 어릴 적 고향 전주의 산천을 떠올렸다. 평생을 수묵의 현대적 조형성에 천착한 그는 이윽고 '남천산수'로 불리는 수묵 산수 연작들을 통해 독창적 화풍을 완성했다.

네덜란드 화가 마인데르트 호메바 역시 고향 마을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대표작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에는 가지치기를 하는 농부,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지평선에 놓여 있는 교회와 마을의 집이 그려진다. 이런 장면들은 감상자에게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정취를 전한다.

이호우 시조 '살구꽃 핀 마을'에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라는 표현이 있다. 송수남의 풍경에 등장하는 전주와 네덜란드 남부 마스강 어귀의 작은 마을 미델하르니스 또한 방문한 적이 없어도 낯설지가 않다.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보편적 풍경이 감상자에게는 '낯익은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림 속 공간이 자신과 직접 인연이 닿지 않는 곳이라도 따뜻한 정경, 반가운 이의 몸짓, 익숙한 집 등의 내밀한 장치들을 통해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그 여행은 지금의 나를 위로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기억과 이미지는 현재의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어준다.

물론 과거의 모든 시간이 꼭 사람에게 행복했던 날들인 것만은 아니다. 과거에 두고 온 어린아이, 찬란했던 장면들이 대변하는 되돌아갈 수 없는 순수함, 두고 온 가능성 뒤에는 초라한 젊음, 실패와 실수의 연속으로 점철된 일상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기억의 다락방에서 먼지 쌓인 상처와 고통의 상자는 더욱더 후미진 구석으로 처박아두고, 오롯이 반짝이고 예쁜 상자만 꺼내게 된다. 시간은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하고 가장 효과적인 처방인 까닭에 망각과 선택적 기억은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준다. 그래서 향수는 병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는 병.

정연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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