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여의도 덮친 '비토크라시'

  • 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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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30 06:57  |  수정 2023-03-30 06:57  |  발행일 2023-03-30 제22면
상대 정당 정책 무조건 반대
길항 정국, 법안은 동맥경화
민주 169석·여당 거부권 무기
정치 실종…의회 규범 사라져
총선 앞두고 정치공학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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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완 논설위원

2023년 봄의 여의도 풍광은 뜨악하고 살벌하다. 협치·협상·딜·밀당·조정 같은 정치언어는 사라졌다. 포연만 자욱하다. 국회가 입법 1번지? 차라리 정쟁의 현장이다. 의원들의 팻말 시위는 이제 뉴스거리가 아니다. 조선시대의 붕당과 구한말식 대결정치가 어른거린다. 여야가 서로 발목을 잡는 길항(拮抗)의 형세다. 상대 정당의 정책과 법안은 무조건 부정하고 반대하는 '비토크라시(vetocracy·거부민주주의)'의 득세다. '비토크라시'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가 2013년 미국의 양당 정치를 비판하며 쓴 용어다.

길항 정국은 주요 법안의 '동맥경화 현상'을 유발한다. 취득세 중과세율 완화를 담은 지방세법 개정안, 양도세 중과 배제 1년 연장, 0세 아동 부모에게 월 70만원을 지급하는 아동수당법 개정안 등 민생법안이 줄줄이 국회에 묶여 있다. 정치의 민생 침탈이다.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 이내로 제한하는 재정준칙 도입도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부 재량은 딱 시행령 개정까지다. 법을 고치는 건 민주당 협조 없인 불가능하다. 윤석열 정부가 하릴없이 정책 공수표를 남발하는 이유다. 취득세 중과 완화 방안도 정부 의도대로 완결될지 의문이다.

상대를 억압할 수단이나 완력이 없다면 '비토크라시'는 동력을 잃기 마련이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민주당 공히 꽤 괜찮은 무기를 장착했다. 민주당의 169석은 셀프 입법 추동력을 높이고 정부 정책을 무력화할 수 있는 공수 겸용 무기다. 집권 여당은 대통령 거부권과 법사위원장 자리를 그 나름의 필살기로 치부한다.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힘의 균형이 외려 대치정국의 장기화를 예고한다.

새로운 입법 공식도 탄생했다. 민주당이 양곡관리법을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한 게 대표적이다. 이른바 '법사위 패싱'이다. 민주당이 '상왕 법사위'를 막기 위한 국회선진화법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 야당이 5분의 3 이상인 상임위가 9개인 만큼 민주당의 법사위 패싱은 앞으로도 심심찮게 선뵐 전망이다. 정치권에선 야당의 직회부에 집권 여당이 대통령 거부권으로 맞서는 무한대치 국면을 우려한다.

"민주당은 입법 폭주를 하고 대통령은 야당에 손을 내미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이종훈 정치평론가), "여야가 상대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한 정치만 한다. 상호 존중이라는 민주적 규범이 사라져 의회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김형준 명지대 교수). 우리는 협치가 사라진 '정치 실종의 시대'를 목도한다. 정치의 본산 여의도는 시나브로 의원들의 시위 공간으로 전락하는 모양새다. 30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압축 민주화'를 일궈낸 내공과 정치력은 어디 갔나 싶다. 내년 총선도 정국엔 악재다. 민생과 대승(大乘)보다 정치공학과 정략을 우선할 공산이 커서다.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부메랑이자 야누스 민주주의의 함정이다.

정의와 공정의 본질을 전파해 온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개정판을 출간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불편한 공존의 서사를 추적하기도 하며 민주주의의 속살을 헤집는다. 샌델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왜 더 큰 상실감을 느끼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와 정치의 함수관계도 묘하다. 삼권분립이 정립되고 자유로운 정당 활동과 정치인의 페르소나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 실종이라니. 아이러니다. 아무래도 올핸 정치도 경제도 봄이 오지 않을 듯싶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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