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2) 이병철, 대구서 삼성상회 열다…이병철, 백화점 설립한 매형 본보기로 국수공장 체계화 '성장가도'

  •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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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07  |  수정 2023-04-07 08:28  |  발행일 2023-04-07 제36면
'별표국수'부터 생산 …1년 만에 업계 3위로

이후 삼성콜라·오렌지주스 등 생산품목 확대

전두환 전 대통령 부친 공장근무 이력도 있어

이병철 장남 이맹희와 전두환은 고교 친구

기막힌 우연으로 훗날 역사 수레바퀴 돌려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2) 이병철, 대구서 삼성상회 열다…이병철, 백화점 설립한 매형 본보기로 국수공장 체계화 성장가도
삼성상회 초창기 모습
이병철이 대구 인교동에 자리 잡은 것은 입지 때문이었다. 일단 부산~대구~대전~서울 더 나아가서는 북한을 거쳐 만주까지 이어지는 철도가 있고 유사시에는 항공편이 있어서 만주에 수출할 수 있는 포항 일대의 건어물, 대구의 사과, 경산의 밤 등 품목의 수출이 용이했다.

자, 수출품목은 준비가 될 터이나 가게를 열어야 한다. 가게 이름은 삼성상회이다. 상회가 붙은 것은 무역까지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무역상사라는 개념이 없었지만, 먼 외국으로 수출을 더욱 확장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그러나 무역만 가지고는 안 된다. 내수가 있어야 한다. 무얼 만들어서 국내시장을 개척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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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는 국수였다. 당시 대구에는 꽤 큰 국수 생산공장이 여럿 있었다. 기업화된 국수 공장이었다. 규모의 경제가 있어야 한다. 영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금이 달렸다. 매형 허순구를 떠올렸다. 허순구는 진주에 문성당 백화점을 하고 있었다. 진주 지수면 승내리 출신인 허순구. 허순구 집안은 오늘날 GS그룹과 그 뿌리가 같다. GS그룹의 태두는 허만정이다. 즉 허만정의 자손들이 처음에는 LG와 동업을 했으나 GS로 독립했다. 허만정의 부친은 허준 의장이다. 승내리에서는 그 어른을 의장이라고 부른다. 마을의 큰 어른이기 때문이다. 허준 의장에게는 장남 허만종이 있었고, 차남이 허만정이다.

허순구는 장남 허만종의 둘째 아들이다. 허순구는 꿈이 컸다.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최초인 백화점 문성당을 진주에 냈는데 당시 진주에는 일본 굴지의 백화점인 미나카이(三中井)가 들어와 있었다. 진주의 소비시장이 미나카이로 쏠릴 때이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일본의 천재 상인으로 불리는 시가현의 오미상인이 그 뿌리이다. 오늘날에도 오미상인은 그 맹위를 떨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 아사히 맥주, 다카시마야 백화점, 세이부 철도그룹 등 일본 최대 재벌들이 모두 오미 출신이다.

'사는 사람도 이롭고, 파는 사람도 이로우며, 세상에도 이롭다'는 삼방요시(三方よし)의 상인철학이 바로 그들이 만든 것이다. '세 쪽이 모두 좋다'는 뜻이다. 오미지역에 있는 오미 하치반 상고는 지금도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일제시대에 그들은 수학여행을 만주로 갔다. 만주의 심양이나 창춘 같은 대도시에 학생들을 풀어놓고 오미 특산품인 칠기 밥그릇이나 모기장을 한 개라도 팔지 못하면 졸업장을 주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이제 겨우 17세 고등학교 2학년생을 물 설고 땅 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생면부지의 땅에 떨어트려 놓고 물건을 팔아 대금을 받아오라니. 그런 경험이 오미 출신들에게 일본의 대무역상사인 '이토추' '도멘' '마루베니 상사'를 탄생시켰다. 한마디로 불타는 투혼이 있었다.

허순구는 진주의 소비시장이 오미상인인 미나카이 백화점에 잠식당하는 걸 싫어했다. 문성당 백화점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문성당 백화점이 자리 잡자, 허순구는 더 큰 시장인 대구로 올라왔고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허만종, 허만정 두 형제 가문은 모두 2만석의 대지주들이었다. 그 허만종의 둘째 아들 허순구의 부인이 이분시로 바로 이병철의 누님이다. 이병철에게는 매형이 큰 의지가 되었고, 그 때문에 대구에 온 이유도 있었다. 이병철은 초등학교를 지수면 승내리의 지수초등에 다녔다. 매형인 허순구의 집에서 숙식했다. 어려서부터 의지가 되어온 사이.

허순구는 이병철이 차린 삼성상회에 투자하여 주주가 되었다. 삼성상회는 우선 국수부터 생산한다. 그 이름이 '별표국수'이다. 오늘날 삼성그룹의 단초가 보인다. '밝게 빛나는 세 개의 별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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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대구 시가 모습
기계에서 밀가루를 반죽하면 피대바퀴를 타고 올라가 펴진 후 엷게 썰려 국수가 된다. 그리고 그걸 건조해서 자르면 상자에 넣어 지고 내다 팔면 된다. 60평의 공장은 하루 종일 잘 돌았다. 1938년 3월1일이 그 사업의 첫날이다. 1938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도 물건은 잘 팔렸다. 종업원이 40명이 넘었다. 시작한 지 불과 1년 만에 국수 시장에서 3위에 올랐다. 기존 선발 국수업체들이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더 이상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일단 품질은 최상으로 유지하면서 계속 노력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보자. 삼성말표사이다, 삼성콜라, 해피콜라, 오렌지주스 심지어는 소주까지 생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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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대구사범학교
이병철이 대구에서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사람의 인물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박정희였다. 1938년 그해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초등 교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교사 생활을 그만둘 작정을 하고 있었다. 교사보다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대구사범 시절 일본인 장교 교관인 아리카와 케이이치(有川圭一) 중좌(중령)는 박정희가 군사훈련 받는 모습을 보고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네는 군인이 되면 잘 할 건데"라고 격려했다.

이병철과 박정희, 이 두 사람은 지근거리에 있었지만 두 사람이 처음 독대한 것은 1961년 5월 말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기적을 만들어 낸다. 또 하나 공교로운 사실은 훗날 대통령이 된 전두환 대통령의 아버지가 국수 공장인 삼성상회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가 있어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와 전두환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가 된다. 여기에 한 사람이 더 끼어있다. 노태우 대통령이다. 이맹희와 노태우는 경북고 동급생, 전두환은 대구공고 학생으로 모두 동갑내기이다. 정말 묘하다. 역사는 기가 막힌 우연으로 만나 기가 막힌 필연이 된다. 무려 세 사람의 대통령과 기업인 집안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 성장한다.

경남 김해의 500만평 땅 투기의 실패는 뼈아팠지만, 대구에서의 사업 시작은 순항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병철은 대구지역의 유지 장인환(경북지사 역임), 여상원(대구상의회장), 한석동(변호사) 등 9명의 모임인 을유회에 가입했다. 거기의 좌장 격이 매형 허순구이다. 을유회는 고서화와 도자기 등을 보고 즐기며 품평을 하다가 그게 끝나면 요정 죽림원에서 국악을 듣는 것으로 이어진다. 요정에서는 당대의 명창들이 나와 조선의 가악을 연주하고 창을 불렀다. 때로 허순구의 별장인 '금호정'에서도 국악을 들으며 술도 마셨다. 허순구는 국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훗날 그는 자신들 앞에서 공연한 국악인들의 연주를 녹음 보존했고, 악보 또한 현금국악보 등을 채록해서 전집을 낼 정도였다.

이병철이 시서화, 도자기 등 골동품을 수집해서 용인에 '호암미술관'을 만들게 된 것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또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가 시집오자 매일 오천 원씩을 주면서 인사동 골동품 거리에서 하루 한 개씩 3년간 사보라고 하면서 안목을 기르게 한 후 나중에는 리움미술관을 만들게 한 것도 이 모임에서부터 유래한다. 이건희 회장이 사후 기증한 10만점에 달하는 이건희 컬렉션을 만든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건희 컬렉션은 한국 최대 최고의 컬렉션이자, 세계 유수의 컬렉션으로 한국을 대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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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966년 이병철이 동양방송TV를 개국했을 때 지시한 것 중 하나가 '국악방송'의 정규편성이다. 매주 한 시간씩 국악을 방송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국내 최초이다. 교보그룹을 창업한 신용호 회장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핀잔을 들어가면서 국악인들의 연주를 들었고, 국악에 심취하게 된다. 간신히 숨만 쉬고 살던 국악이, 국악인이 이병철의 배려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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