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몸의 편에 서서 읽는 성서…경전 내용의 근원은 성령체험 등 '몸의 경험'

  • 조성진(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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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07  |  수정 2023-04-07 08:29  |  발행일 2023-04-07 제38면
기독교 등 종교의 출발은 몸 관련 수행에 기초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은 성찬 함께 나누기

'몸의 생각 중심'을 잃을 때 사이비에 현혹

미디어의 시대 '몸을 닮은 신체 이미지' 주목

[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몸의 편에 서서 읽는 성서…경전 내용의 근원은 성령체험 등 몸의 경험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신학자들에게 호평을 받은 예술목회연구원 창립대회 축하공연 ' 세 가지 유혹', 2013년.

◆몸을 떠난 생각은 허튼 말에 매혹되기 쉽다

마임이스트가 몸짓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기독교의 성경 이야기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 JMS 정명석의 실체가 드러나고 예상 밖으로 많은 사람이 비이성적인 말과 이미지에 매혹당하는 것을 보고 그 문제의 본질이 우리가 '몸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잃어버린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삶이 고달플 때 우리들의 생각은 그 고달픈 몸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몸을 떠난 생각은 허튼 말에 매혹되기도 쉽다.

대부분 종교의 출발은 몸과 관련된 수행이나 생활의 실천에 기초한다.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성령을 체험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체험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예배 가운데 성찬이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뿌리에는 그와 같이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 같은 세상, 우리 식으로 말하면 대동세상이 있다. 그들에게 부활은 이제까지의 약육강식의 질서로 가득한 세상을 이기고 함께 나누며 누리는 대동세상을 얻었다는 확신이다. 성서는 그 체험의 밭에 자라난 숲이다. 그렇게 성서는 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책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인 의례이며 천도재인 영산재는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던 일, 즉 영산회상을 재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그중에 함께 음식을 나누는 공양에 주목한다. 이는 기독교로 치면 성찬이며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그 설법을 듣고 삼매경에 빠져 꽃비가 내리는 것을 체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기독교의 오순절 성령강림과도 닮았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사도행전 2장 3절)

종교의 경전은 이처럼 몸으로 체험한 어떤 사건들 위에 얹혀있는 것이다. 말씀의 뿌리에 몸이 있다.

◆종교와 몸 사이를 화두로 삼다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신입생 때 우연히 마임을 배우게 되고, 다음 해에는 신학과 동아리 종교극회에 들어가 연극 활동을 하게 된다. 낙제도 하고 학점이 모자라 한 학기를 더 하면서 다닌 5년 반 동안 삼사십 편의 크고 작은 연극을 했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달랐다. 그 안에는 극적인 사건이 가득했다. 성서의 내용을 몸으로 표현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교회의 주류가 되는 계층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성서와 음악 이외의 모든 표현 방식을 우상숭배로 규정했다. 특히 몸으로 하는 표현은 속되고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지금까지 종교와 몸 사이의 문제는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화두다.

일제와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사회와 같은 광야를 거치며 성장한 한국 교회는 무조건 하늘만 쳐다봤다. 그 하늘과 관련된 것을 영적이라 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엔 속된 몸과 땅이 있었다. 왜 하늘만 바라봤을까. 그 단순한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땅에는 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생산이 턱없이 부족한 사회. 좋은 것에 대한 갈망은 모두 하늘에 투영했다.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못사는 것은 정신의 문제라 했고, 청소년에게는 꿈을 가지라 했다. 사회 전체가 정신을 그토록 강조했다.

하아비 콕스라는 신학자는 그러한 현상을 정신화라 했다. 현실 세계에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모두 정신의 세계로 가져가는 현상을 말한다. 그것은 왜곡이고 거기엔 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개념이 세속화다. 다시 문제를 땅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그 방향에 동의했고 몸의 편에 서기로 했다.

[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몸의 편에 서서 읽는 성서…경전 내용의 근원은 성령체험 등 몸의 경험

◆몸으로 읽는 성서

대학 시절 성서공동연구라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한 성경공부 그룹에서 활동했다. 공동체성서연구 또는 몸으로 읽는 성서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별칭에서 보듯 현실 생활에서 공동체가 공유한 체험과 소위 영적인 체험이 아닌 이 땅에서 몸으로 겪는 체험을 통해 성서의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모임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으로 대표되는 성장심리학에 기초한 상담기법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에서 탄생한 바닥공동체 니카라과 솔렌티나메 농어민의 성경공부가 책으로 소개된 것에 고무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내가 마임을 통해 성서 읽기로 인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 몸짓을 통해 그 말씀의 뿌리를 눈치챈 것일까.

미디어의 시대다. 사람들은 이제 텍스트보다는 이미지를 주목하고 이미지 가운데서도 자신의 몸을 닮은 신체 이미지에 주목한다. 그렇다. 이제 뿌리로 돌아갈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대의 신화적인 언어와 종교적 색채에 갇혀있는 성서의 알맹이를 교회 밖에서도 눈치챌 수 있는 몸의 언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 성서는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는 고전이요, 중요한 인문 도서 가운데 하나다. 인문학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요즘, 성서를 종교적 언어 안에 가둬두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스라엘과 한국 근대사의 평행이론

중심이 없어진 세상이다. 기준이 없으니 모두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가족 간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내 욕심을 챙기는 것이 우선인지 남을 배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빡빡한 경쟁사회에 온몸으로 뛰어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뒤로 물러서서 안빈낙도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전통사회를 지탱하던 가치가 가차 없이 배반당하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언론을 비롯하여 법원, 정치, 종교, 학교 그 어느 영역에서도 본연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 시작이 어디인가? 나는 미래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풍요의 역설'이라는 말에서 그 힌트를 얻었다. 이 세계가 유사 이래 처음 경험하는 풍요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시작은 풍요에 있었다. 풍요 앞에서 이전의 질서가 모두 무너진 것이다.

성서에서 먹고사는 문제 또는 풍요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생활을 하던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가장 큰 근심거리였던 시절에서 무언가를 심으면 소출을 얻을 수 있는 땅으로의 이동. 이 과정은 우리나라 근대사와 일정하게 평행이론을 보여준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전쟁을 겪고 굶주림 속에서 지냈던 나라가 한강의 기적 이후에 적어도 먹을 것 걱정은 하지 않는 시절을 맞았고 국민소득 또한 선진국 수준에 이른 이 여정은 출애굽의 여정과 너무도 닮았을 뿐 아니라 그 변화의 속도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그러니 해방과 방황, 풍요 그 이후의 삶이 가져올 희망과 질곡을 성서에 물어볼 필요가 있다.

◆거친 광야에서 풍요의 땅으로

출애굽 과정에 대하여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갖는 의문은 실제로 몇 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왜 40년이나 지체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감신대의 방석종 교수가 인류학적인 연구를 통해 답을 내놓았다. 방금 노예상태에서 풀려난 하비루라는 소수종족이 정착하여 안정된 시스템을 갖춘 부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을 차지하거나 그곳에 정착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나안 외곽의 황량한 광야에서 부족 대부분을 군대처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필요하면 주변의 작은 부족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생활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모세가 야훼로부터 받은 십계명으로 상징되는 율법은 아마도 이 군대사회를 엄격한 규율 아래에 두는 방책이었을 것이라 본다. 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군부독재를 경험했던 것과 같이 그들의 정치체제는 아마도 오늘의 종교파시즘에 가까울 것이다.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렇게 율법과 집단주의에 익숙한 이스라엘 민족이 젖과 꿀이 흐른다는 풍요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어떻게 적응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풍요의 땅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

가나안은 농경사회다. 광야에서 한 세대 이상을 지낸 이스라엘민족은 농사하는 일에 서툴렀다. 가나안을 야금야금 접수하면서 원주민에게 농사하는 법을 배웠다. 당연히 그 지방의 풍요의 신 바알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포함된 농사 기술을. 두 주인을 섬긴다는 예수의 지적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것이다. 너희를 이곳까지 인도한 야훼를 섬길 것이냐, 현재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바알을 섬길 것이냐?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해 주는 율법이라는 이념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했고 민초는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풍요를 향한 욕망을 드러냈다. 그 사이에서 예수는 야훼도 바알도 아닌 '압바(abba·아버지)'라는 이름을 제시했다.

하나님은 원래 야훼와 같은 전쟁의 신도 바알과 같이 욕망에 답하는 신도 아니다. 그는 친근하고 자상하게 우리의 일상을 살피며, 늘 중심을 잡아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가치와 욕망의 경계를 허문 것이다. 그러니 그분이 함께하는 한 옳은 일을 하면서 배고파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가나안의 경제 규모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오천 명이 서로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그런 규모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내놓은 어린아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하늘이 준 그 풍요를 어떤 방식으로 나누는가만 남아 있다. 그 가르침이 이웃사랑인데 오늘날 정치적으로는 기본소득 같은 정책이다. 포도원농장 주인 이야기가 그런 종류의 비유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겨우 몇 시간 일한 사람에게 같은 품삯을 주다니! 성서는 그러한 나눔의 삶에 대한 이야기나 먹고사니즘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읽고 있지 않을 뿐이다.

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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