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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음〈소설가〉 |
'문학광장, 문장의 소리' 라디오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이다. 이번 회에는 내가 출연하게 되어서 녹음을 하러 갔다. 신간을 낸 작가가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 프로였다. 나는 내 소설집 속 단편소설 '세도나'에 관하여 이야기하다가 작년 여름에 돌연사한 둘째 형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어릴 때 키 큰 미국인이 둘째 언니와 결혼하겠다고 우리 집에 왔다. 그는 콩쥐팥쥐 동화책을 내게 주었다. 그 책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다며 아끼는 책이라고 말했다. 나는 선물이 좀 시시해서 밖으로 나와버렸다. 신발을 신으려는데 그의 신발이 보였다. 그의 신발이 군함처럼 커서 내 신발을 넣어 보았다. 그는 나의 장난을 나무라지 않고 귀여워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과 5·18(민주화운동)을 겪었다. 그는 학원 강사를 하다가 영어학원을 차렸다. 그때 학원법이 개정되면서 학원을 운영할 수 없어서 투자했던 돈을 날리고 미국으로 갔다. 아빠는 여섯 딸 중에 둘째 딸을 제일 사랑했기에 공항에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아빠는 언니를 미국에 보내고 몇 년 후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 언니 부부가 왔다. 어린 조카는 시골집에 머물던 내내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 그 후 형부와 조카는 좀처럼 한국에 오지 않았다. 언니만 친정 가족을 보러 왔다.
내가 형부를 다시 만난 것은 삼십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조카가 초대한 하와이 여행이었다. 형부는 고집 센 미국 할아버지가 돼 있었다. 2차대전이 일어났던 진주만을 보여주면서 애국심에 불타던 형부를 잊을 수 없다. 나는 형부에게 화를 냈다. 2차대전에서 미국 사람들 죽은 것만 억울하냐고. 1980년에 광주사람들이 죽어 갈 때는 왜 가만 있었냐고. 내 속에 든 부조리한 의문을 초라하게 늙은 백인 남자를 공격하며 풀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라디오 녹음이 끝나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광주에 있던 모든 외국인이 외신기자일 수는 없다. 외국인이던 형부는 그때 광주를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는데, 그만큼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군인의 총칼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지난여름에 언니를 보러 미국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나는 언니의 울음과 하소연을 여러 날 들었다. 언니가 잠든 밤이면 형부의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형부가 그 밤에 와서 내 옆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내 소설에는 간혹 형부가 등장했는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라디오에 그의 이야기를 실컷 하고 온 오늘, 나는 그의 삶의 방식이 타인에게 무해했던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를 타박하며 했던 말과 그를 내 소설에서 훼손했던 것을 사과하고 싶었다. 언젠가 나는 그의 삶을 기억해서 내 글에 남길 것이다. 고집스럽지만 그 누구에게나 무해했던 그에 관하여.박지음〈소설가〉

박지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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