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자유민주주의 싹을 틔운 4·19혁명

  • 김한기 구미노인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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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19  |  수정 2023-04-19 06:57  |  발행일 2023-04-19 제23면

[기고] 자유민주주의 싹을 틔운 4·19혁명
김한기(구미노인대학 학장)

자유당의 장기집권 음모가 진행되는 가운데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른 1960년 2월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개최됐다. 선거패배를 예감했던 자유당 정부는 정권욕에 눈이 멀어 고교생들의 유세장 운집을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를 강행했다. 학교에 따라 갑자기 임시 시험을 치기도 하고, 단체 영화관람이나 토끼사냥을 하러 가는 일이 벌어졌다. 자유당 독재의 간계를 파악한 학생들은 불의에 항거했다.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경북고와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이 주도한 2·28민주운동이었다. 우리나라 민주화에 불을 지핀 계기가 됐고, 오늘날 시민의 정치 참여가 자유로워진 근원이라 하겠다.

2·28민주운동은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다. 얼마 후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개표 조작을 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며 부정선거의 무효 및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위에 나섰다. 3월18일 데모 대열에서 실종됐다가 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더 격화됐다. 서울에서는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구속 학생들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지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서울지역 각 대학의 총학생회는 물밑 논의를 통해 4월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행동지침을 정했다. 이날 경무대 앞에는 대학생 2만여 명이 모였다.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과잉진압은 국민을 격노케 했고, 대학교수마저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시국 선언을 했다. 이윽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 냈다.

4·19혁명 당시 필자는 대학 3학년생이었다. 뿌리까지 말라비틀어진 민주주의 나무를 살려보자는 일념으로 학우들과 뜻을 같이하며 교문을 나섰다. 당시 학생회장은 자유당 고위층의 친척이어서 동료 학생들은 변론부장인 필자에게 데모대의 총지휘를 맡겼다. 도지사 관사로 가기 위해 2군사령부 앞을 지날 때 소총에 칼을 꽂은 병사들은 오히려 격려하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광란하는 경찰들이 휘두른 방망이에 수많은 동료들이 부상을 당했고, 소방관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붉은 염료를 섞은 물대포를 쏘아댔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부상 당한 학우들의 쾌유를 빌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부상 학우를 돕기 위해 일행은 어깨에 띠를 두른 채 모금함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다음 날 아침 필자는 학장의 지프차에 스피커를 장착하고 간부 3명을 대동해 대구 시가지를 누비면서 "자유당 정부는 무너졌습니다. 생업에 정진합시다"라는 구호로 하루 종일 거리방송을 했다. 스피커 소리에 거리로 나온 시민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주었다. 4·19혁명은 한국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굵직한 획을 그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다. 4·19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이 우리 민족을 높이 평가하게 됐고, 세계 민주화 운동사에 동참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시대감각이나 세대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4·19는 '자유회복과 질서의식'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당시 거리의 함성이 지금도 귓전에 메아리치는 듯하다. 4·19는 가장 보람 있고 값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김한기(구미노인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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