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권기덕 (시인) |
후회와 아쉬움이 아니더라도 현재 삶에 지쳐 휴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지나온 내 발걸음을 찾아 다시 가볼 수는 없을까. 물론 추억의 영화 '백 투 더 퓨쳐' 시리즈(1987~1990)처럼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여전히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기엔 이르다. 심리적인 가능성도 있다. 다만 어른이 된 내가 그 시절의 나를 소환해야 하고, 말을 걸어야 한다. 말을 거는 방식은 뭐 그리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가령 유년 시절 살았던 집이나 마을을 직접 찾아간다. 골목에서 눈을 감고 내 어린 그림자들을 풀어놓는다. 그러면 그 그림자는 말과 행동을 하고 친구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자. 물론 '시차'는 존재한다.
김경주 시인은 "우리가 접었던 무수한 종이비행기가 만들어 내던 '시차'는 우리가 무언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싶었던 순간의, 다른 언어가 필요했던, 어디론가 부유해 가는 순간의 '착시' 같은 것일지 모른다."(시 '종이로 만든 시차' 부분)라고 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순간의 친구들은 '착시'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그때의 친구는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친구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라는 실체는 분명하다. 너(친구)로 인해, 해 질 녘 2층 옥상에서 이웃들과 함께 저녁을 먹던 풍경들이 되살아나고, 밤이 되면 신비스러운 나무 아래서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가 떠올려지기도 한다. 자칫 방심해서 어린 내 모습을 잊어버리면 친구 그림자는 사라진다. 나는 내 그림자들에게 질문한다. 행복하냐고. 그렇게 필자는 용문면 골목, 예천읍 맛고을길, 안동시 용상동 시장골목, 대구시 캠프조지 돌담길과 서문시장, 신매동 욱수천을 지나 책상 앞에 앉는다.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에 등장하는 타임 리프(과거 또는 미래로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가 따로 없다.
시간을 걷는다는 건 어쩌면 봄여름가을겨울이 뒤섞인 숲에서 길을 잃는 일이다. 변화무쌍한 나의 모습들과 만나며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착시' 같은 너를 그리워하는 일이다. 그래서 너의 슬픔과 쓸쓸함을 안아주는 일이다. 언제나 네 편이 되어주는 일이다. 언젠가 내가 있었던 장소가 사라져도 내 그림자는 그곳 어딘가 모퉁이에 웅크려 앉아 있거나, 어떤 감정의 상태에서 나를 불러 세우곤 한다. 나와 너의 그림자는 공존한다. 현재와 과거가 함께한다. 그렇게 한 번 걸은 시간의 풍경들은 다시 걸을 수 있는 목록이 된다. 공원이 된다.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린다. 평화로운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이제 곧 다른 누군가를 불러내어 함께 걷게 될 순간이 된다.
권기덕 (시인)

권기덕 시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