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고산골에서 만난 왕유

  • 정연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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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18  |  수정 2023-04-18 07:46  |  발행일 2023-04-18 제17면

[문화산책] 고산골에서 만난 왕유
정연지<작가>

대나무 그윽한 숲속에 홀로 앉은 이가 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거문고 선율에 맞춰 휘파람을 분다. 아무도 없는 깊은 숲속 은자의 밤을 환한 달이 밝혀준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죽리탄금도(竹裡彈琴圖)'이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시 '죽리관(竹里館)'이 쓰여 있다. 이 시의 주인공은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으로 추앙받는 왕유이다. 그는 26세에 벼슬을 그만두면서 망천에 별장을 짓고 시우 배적과 교류하며 '망천집'을 남겼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언덕, 고요한 물결과 굽이진 개울, 큰 호수, 깊은 숲, 고운 산의 기운이 느껴지는 망천의 자연경관은 '망천집' 20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홍도 그림의 시 '죽리관' 역시 망천집에 수록된 것이다. 이 책 속 아름다운 자연과 은일자의 모티브는 후대에 영감이 된다. 망천은 지금의 시안으로부터 45㎞ 정도 떨어진 산시성 남전 근교에 실재하는 곳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에게 왕유의 망천은 초월한 정신세계에 이른 선비가 머무는 이상향이자 가보지 못한 상상 속 공간이었다. 사람들이 절경을 그린 그림을 완상하며 마음의 병을 달래듯 화가 김홍도는 동경하는 망천을 직접 그려 그림으로 남겼다.

현대인에 비해 자연과 가까이 지냈던 옛사람들에게도 자연은 속세를 잊고 정신을 귀의할 수 있는 은거지였다. '월든'의 저자 핸리 데이비드 소로는 약 200년 전, 도시생활로 인한 인간의 황폐한 삶을 우려했다. 공해와 과잉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을 살고 있는 현재, 인간에게는 어느 때보다 자연이 필요해 보인다.

필자는 가끔 가까운 고산골에 오른다. 신천을 곁에 두고 있는 고산골은 망천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고산골은 대구 남구 봉덕동에 존재하는 작은 골짜기이다. 잘 쓰지 않던 몸과 마음의 동세(movement)에 집중하면서 산을 오르면 육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조선 중기 문인 유희춘은 "격문을 읽으면 두풍을 낫게 하듯이 '망천도'도 사람의 병을 낫게 한다"고 했다. 좋은 풍경은 그림으로만 보아도 약이 되는 것이다.

가끔 아버지는 나의 동행이 되어 주었다. 심신을 위로하는 자연과 외로움을 덜어줄 좋은 사람이 있는 곳, 고려 말 이색은 좋은 풍경을 맞으면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흡사 망천과 같다." 대구 고산골이 필자에게는 망천인 셈이다. 정연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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