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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엽 한자연구가 |
우리의 언어생활에 한자는 이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일상에서 한자로 된 자료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한자로 무엇을 적는 일은 더욱 적다. 기껏해야 부조금 겉봉에 필체 자랑삼아 몇 자 적는 경우뿐이다. 이때도 이름은 반드시 한글로 적는다. 혹 부조금을 받는 사람들이 가뜩이나 어려운 내 이름자를 읽지 못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한자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에는 한자 사용과 공부를 둘러싼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주장을 하나씩 가지고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논쟁이 하루라도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한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이유가 없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계몽시키듯 설득할 필요도 없다. 억지로 배우게 할 일이 아니며 억지로 막을 일도 아니다. 각자 필요한 공부를 원하는 대로 하면 될 일이다.
한자를 배우려는 사람을 도우면서 한 가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수준 높은 한문을 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말은 아니다. 상급의 한자 능력 시험을 목표로 하거나, 중국어나 일본어를 공부할 사람을 향한 말도 아니다. 우리말 속의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한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조언이다. 그들에게 한자 공부의 강박감을 없앨 수 있는 말을 하고 싶다. "한자는 몰라도 한자어는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 한자보다 한자어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한자가 목적이 아니라 한자어를 아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말 속에 많은 한자어가 있지만 자주 쓰는 낱말은 대체로 2천 자 내외의 한자로 해결된다. 물론 2천이 적은 숫자는 아니며 그 글자로 모든 낱말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에 포함된 모든 글자를 알 필요는 없다. 가장 기본이 되는 200여 개의 부수자부터 익히고, 능력 시험 3급 수준에 해당하는 1천800자를 정성껏 한 번 훑는 것으로 일단 한자 공부를 끝내는 것이 좋겠다. 완벽하게 알지 않아도 좋으며 시간이 지나 잊어버려도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한자는 몰라도 된다"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한자책을 덮어도 된다.
이때부터 마음에 둘 것이 바로 "한자는 몰라도 한자어는 알아야"라는 생각이다. 일상용어든 전문용어든 그 속에 포함된 한자는 몰라도 괜찮다. 위에서 공부한 실력이면 최소한 자전이나 국어사전에서 스스로 한자를 찾거나 구별할 수는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모르는 낱말은 그때그때 확인하면 될 일이다. 자전에서 한자를 찾아 확인할 수 있고, 비슷하게 생긴 글자들을 구별할 수만 있어도 한자어 이해를 위한 준비는 충분하다.
한자를 몰라도 된다는 역설적인 표현은 물론 최소한의 공부를 거쳤음을 전제로 한다. 알파벳이라도 알면 영어사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부수자도 모르면 한자어에는 까막눈이 된다. 우선 기초자를 익히자. 높은 수준의 공부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아가면 된다. 한자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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