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 〈영남일보 DB〉 |
![]() |
파블로 피카소 연합뉴스 |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시프리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Pablo Diego Jose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i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isima Trinidad Ruiz y Picasso), 피카소의 풀 네임이다. 1881년 10월25일, 스페인 안달루시아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공예학교 미술교사였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는 일찌감치 아들의 천재성에 경탄하며 화재(畵材) 일습을 물려준 뒤 자신의 화업을 작파했다. 피카소가 8세, 11세 때 그렸다는 투우사와 토르소 소묘 등을 보면 이후 아들의 뒷바라지에만 전념한 아버지와 '12세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음'이란 피카소 스스로의 말이 이해된다. 14세, 바르셀로나 라 롱하 미술학교 최연소 입학, 월반을 거듭해 16세에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타고난 재능이 지나친 천재의 비극은 역시 드라마틱한데 피카소 또한 그러했다. 미술학교의 경직된 교육에 환멸을 느낀 어린 피카소는 수업을 자주 빼먹고 벨라스케스와 엘 그레코, 고야의 그림이 가득한 프라도 미술관이나 마드리드 거리를 쏘다니거나 바르셀로나, 말라가, 파리로 훌쩍 떠나는 등 일탈했다. 20세가 되기 전 이미 고전주의를 마스터한 아들의 화풍과 그 가치를 아버지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했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성 루이스마저 버리고 어머니의 성 피카소로 자신의 그림에 서명하기에 이른다.
1900년 이미 스페인의 주요 공모전을 휩쓴 19세의 피카소는 친구 카사헤마스와 파리로 가 작품 3점을 파는 등 성공의 예감에 들뜨지만, 곧 실연당한 카사헤마스의 권총자살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바르셀로나로 되돌아간다.(그 실연과 자살에 피카소가 관련되었다는 설도 지배적이다.) 이때부터 피카소의 소위 어둡고 우울한 청색시대가 시작된다. 친구의 죽음, 죄책감, 깊은 슬픔을 화면에 블루로 꽉 채워 그린 이 시기를 미술사가들은 피카소 특유의 외부적 사건으로 유발된 충동적, 즉물적, 감각적 상상력 촉발 시점으로 본다.
1901년 유명한 화상 보라르가 기획한 파리 첫 개인전에서 만난 쟈콥을 비롯한 아폴리네르, 브라크 등이 모여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예술 반항아 집단이 형성된다. 피카소는 어느 곳에서나 카리스마와 천재성으로 중심을 차지했다. 약관 20세에 이미 자신의 예술 세계를 어느 정도 구축해 황소처럼 끊임없이 화폭을 여러 개 두고 작업하는 것으로 열정을 표출했고, 때론 그 부작용으로 난폭함과 카페에서의 총격 사건, 기성세대에 대한 예의 없음으로 파리 화단을 들쑤시기도 했다.
파리는 그때 파리만국박람회를 기점으로 번성하는 벨 에포크(Belle Epoque)로 활짝 꽃피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가난했고 피카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4년 몽마르트르의 세탁선(Bateau-Lavoir) 작업실에서 첫 연인 올리비에 페르낭드를 만난다.
피카소를 일러 '그는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사람' '능수능란한 10여 가지 표현 수단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10여 개의 양식을 가진 화가' 등 수많은 수사(修辭)가 따라붙는데, 여성 편력에 관해서도 상식과 도덕적 잣대로 잴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호사가들은 피카소의 연인이 수없이 바뀔 때마다 뭉뚱그려 일곱 번의 화풍 변화를 이렇게 짚기도 한다.
올리비에 페르낭드의 청색시대, 에바의 장미시대, 첫 부인 올가의 고전주의시대, 마리 테레즈의 메타 모르포제시대, 도라 마르의 게르니카시대, 프랑스와즈 질로의 목가시대, 자크린느 로크의 만년시대, 사실이든 아니든 그의 작품에는 수없이 많은 여성이 등장하는데 열거한 여성들의 면면이 특히 많이 그려진 것도 사실이다. 피카소의 최측근이었던 화상 컨와일러는 이를 일러 '나는 이렇게까지 고도의 자전적 예술이 또 없다고 믿는다. 피카소의 작품에 등장한 여성의 모습과 얼굴은 모두 그가 사랑한 여성상이다.'
청색시대가 저물고 장미시대가 열릴 즈음인 1906년 피카소는 일생의 경쟁자 마티스를 만나고 그해 사망한 세잔의 입체감과 깊이를 자신의 방법으로 연구해 터득하게 된다. 브라크와 루소 그리고 그때 붐이 일기 시작한 아프리카 미술에서도 영감을 얻어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한다. 피카소 큐비즘의 시작이었고 그 유명한 '피카소, 28세, 돈 걱정으로 움츠러들 필요가 없을 만큼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8세, 이미 부자였고, 65세 무렵 누구도 의심할 여지 없이 백만장자 미술가로 불렸다'란 신화가 그의 앞길에 융단처럼 펼쳐졌다.
1913년 아버지 루이스가 사망하고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즈음 피카소는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조각에도 손을 대고 판화, 도기를 제작했으며 콕토, 샤티, 마신, 샤넬 등과 전방위적 예술 무대 제작, 사실·추상·인상주의, 표현주의, 신고전주의, 쉬르 레알리즘 등 고전적이거나 새롭고 실험적인 거의 모든 예술활동에 참여하거나 주창했다. 그의 모토 '진정한 예술가는 일찍이 세상에 없던 것, 새로운 그 무엇을 독창적으로 창조함으로써 의미 있는 낯선 하나를 새롭게 보탤 수 있어야 한다'의 실천인 셈이었다.
1936년 조국 스페인 각지에 대대적인 전시회를 개최하고 공화당 정부로부터 프라도미술관 명예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고 막 발호하던 히틀러는 프랑코 파시스트정권을 위해 바스크 소도시 게르니카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대작 '게르니카'를 그려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했다. 그림은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다가 프랑코 사후 마드리드 레이나소피아미술관에 소장, 상설전시되고 있다.
![]() |
박미영 (시인) |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시카고 전시회를 마치고 독일 점령하의 파리로 돌아가 작업을 계속한 피카소의 일화는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세계 여러 정세, 전쟁과 더불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세계 부조리에 관해 누구보다 앞장서 통렬한 고발과 비판의 목소리를 낸 예술가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그에 대한 논문과 일화는 일종의 현대 오디세이처럼 읽힌다.
1951년 고야를 패러디한 '한국에서의 학살'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록한 예술가의 위로처럼 느껴져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 아니겠는가. 피카소는 글쓰기마저 재능이 있어 예술에 관한 수많은 명언을 남기고 시도 썼다. 1973년 4월8일 향년 91세로 평생 조국처럼 여긴 프랑스 무쟁에서 영면했다. 그의 작품은 놀랍게도 3만여 점, 유산 상속 시 그 작품들의 가격이 8조원 정도였다는데 지금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시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