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앞구르기 하는 뱀 이야기

  • 임수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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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01  |  수정 2023-05-01 07:47  |  발행일 2023-05-01 제14면

[문화산책] 앞구르기 하는 뱀 이야기
임수현<시인>

얼마 전 선배 시인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신문 한 꼭지를 보내왔다. 안부라면 안부, 인사라면 인사인 신문의 내용은 앞구르기 하는 꼬마 뱀 이야기였다. 이 꼬마 뱀은 위기의 순간 자신의 몸을 둥글게 말아 앞구르기를 해 도망친다는 것이었다. 천적으로부터 더 안전해지기 위해 자신의 흔적을 지우면서 달아나는 이 방법은 꽤 오랜 연습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뱀의 입장에선 진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지만 내겐 습작기의 은유로 읽혔다.

체육 시간, 친구들은 쉽게 앞구르기로 매트를 사뿐히 넘어가는데 나는 비틀거리다가 구석으로 처박히기 일쑤였다. 체육선생님은 다리를 붙잡아 줄 테니 넘어보라고 했다. 겁이 났지만 물러설 곳이 없던 나는 힘껏 몸을 굴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가 실패, 공중에서 두 다리가 멈춰 실패, 그러다 정말 우연히 한 바퀴를 완벽하게 구르는 데 성공했다. 그때 처음 몸이 마음과 아주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잠시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뱀이 오랜 연습 끝에 긴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앞구르기를 할 때처럼. 그게 도망이든 도약이든 그 순간을 넘어야 다음이 온다는 걸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나의 습작기는 길었고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신춘문예 최종심에 몇 번 이름이 올랐으나,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하고 '종심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때 '잠깐만!' 하고 다리를 넘겨주던 선배 시인이 있었다. 이 시집 읽어보라든가. '괜찮네!' 같은 말이 도움닫기가 되어 앞구르기에 성공, 마침내 등단했다. 생각해 보면 기나긴 습작기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 글을 써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내 차례가 온다는 믿음도 알게 되었으니 얻은 게 많은 시간이었다.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환대의 마음으로 그날의 체육선생과 선배 시인처럼 넘을 듯 넘지 못하는 이의 다리를 잡아주고 싶다. 그게 뭐든, 꼬마 뱀이 안부를 대신해 "저도 요즘 앞구르기 해요"라고 답장을 보냈다.임수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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