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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공군의 진주만 공습. <야후재팬 위키> |
◆중일전쟁에서 2차 세계대전으로
1941년(쇼와 16년) 12월8일 오전 7시, 일본 전국에 다급한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임시 뉴스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대본영 육해군부에서는 제국 육·해군이 오늘 8일 아침 6시, 서태평양에 있는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섰다고 발표했습니다. 제국 육·해군은 오늘 8일 6시에 서태평양에 있는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섰습니다."
일본은 라디오 뉴스 바로 전날인 7일 아침에 하와이의 진주만에 제로센 전투기를 보내 맹폭격을 감행했다. 이제는 중일전쟁이 아니라 태평양 전쟁,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로 전선을 확대했다.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다.
전선은 중국을 넘어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미국과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영국군을 상대로 한 버마 전선, 오스트레일리아군까지도 상대하는 남서태평양 전역이 포함되었다. 일본은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소형 잠수함 5척에 전투기와 폭격기 무려 441대를 띄워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군함대에 맹폭격을 가했다.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 군인 2천334명이 현장에서 사망, 1천143명이 부상했다. 전함 4척은 침몰, 1척은 좌초, 3척이 반파되었다. 순양함도 3척 손상, 구축함 3척 손상, 기타 함선 2척 침몰, 1척 좌초, 2척이 손상되었으며 전투기와 항공기는 188대가 전파, 159대는 손상되었다.
이병철은 한숨을 쉬었다. 아내는 만삭이었다. 곧 아기가 태어날 것이었다. 그 아기의 이름은 건희였다. 튼튼할 건(健), 빛날 희(熙). 전쟁이 이 정도로 확대되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만주의 재봉부대
이 무렵 만주에서는 독립군이 중국의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 독립군을 돕기 위해 지하에서는 '재봉부대'가 열심히 미싱으로 군복을 누비고 있었다. 재봉부대는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가 만든 부대로 솜으로 바지를 누벼 매서운 만주의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수십 명의 부인들이 재봉틀을 돌려가며 군복을 조달하던 부대였다. 안성녀는 일본군에 쫓겨 중국 변방을 다니면서도 광복이 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경남 의령 출신의 안희제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대느라고 만주 일대를 은밀히 다니고 있었다.
중일전쟁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발발
재봉부대, 지하서 독립군 군복 누벼
안희제, 中 넘어가 농민에 민족교육
이육사, 귀국하자마자 고문으로 순국
박정희, 만주국 육군 신경군관학교
혈서 쓰고 입교 2년 후 예과 수석졸업
광복 후 이병철 사업 펼칠 구상 시작
그가 세운 백산상회는 1927년 일본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비밀리에 조선의 유지들을 상대로 자금을 모아 만주를 거쳐 상하이 임정의 김구에게 직접 가져다주고 있었다. 안희제 자신도 독립군을 돕기 위해 자신의 2천 마지기의 논을 팔았다.
그에게 돈을 준 사람은 경주의 2만석지기 부자 최준, 진주 지수면 승내리의 만석꾼 허만정(GS그룹 허창수 회장의 조부) 등이었다. 이병철의 아버지 이찬우도 몰래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독립자금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이병철이 제일모직을 설립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친히 '의피창생(衣被蒼生·옷이 새로운 인생을 연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까지 했다.
◆안희제, 옥에서 풀려나자 3시간 만에 사망
일본경찰은 비밀리에 안희제를 뒤쫓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1937년 중일전쟁의 승리로 만주에서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하얼빈 일대에서는 여전히 조선독립군이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안희제는 일찍이 1933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투쟁의 근거지 마련과 재만주 조선 소작농들의 자력갱생을 위해 길림성 영안현(寧安縣) 발해보(渤海保)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웠고, 조선농민 300호를 유치, 농장 내에 발해학교를 설립해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경찰은 안희제를 체포, 상하이 임정에 전달한 독립자금의 배후를 대라고 고문했다. 그러나 끝내 입을 다문 안희제는 감옥에 들어갔고 약 10개월간 수형생활을 하면서 계속 고문을 받았다. 고문으로 몸이 피폐해진 안희제는 1943년 8월3일, 출옥했다. 그는 기어가다시피 해서 목단강성 동경성에 있는 동경성가병원에 도착해 병원 문 앞에서 쓰러졌다. 집안의 동생인 안영제 병원장이 그를 발견, 회생을 시도했으나 그는 병원 도착 세 시간 만에 숨졌다. 모진 고문의 후유증이었다. 향년 58세.
바로 그 무렵, 시인 이육사는 1943년 베이징에 있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이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베이징에서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지사들과의 대질심문을 위해서였다. 이육사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일본경찰은 능지(陵遲)를 시작했다. 능지란 살점을 한 점 한 점 도려내는 고문이다. 당시 일본경찰은 금속 칼도 아닌 대나무 칼로 살을 도려냈다. 그 경우 고통이 세 배 이상 더 심하다. 이육사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지하 고문실에서 1944년 1월16일, 순국했다. 그의 나이 겨우 39세였다. 수형번호 264번에서 유래된 이름 이육사. 본명은 이원삼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쓴 시 '광야'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바로 조선의 광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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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단강성 중심가 긴자 거리. <일본우정국 엽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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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 <야후재팬 위키 박정희 항목> |
◆2차 세계대전은 악화일로
중일전쟁 이전부터 일본정계는 군부에 장악되었다. 군인의 목표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게 출세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만주를 경영할 때도 그랬다. 당시 만주는 군부와 민간관료들의 헤게모니 쟁탈의 무대였다. 기세등등한 일본군벌은 만주에서의 모든 권한을 쥐락펴락했다. 만주철도 주식회사 초대 총재로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부임할 때 그의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관동군은 만주철도의 일에 어떠한 지시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일본내각이 보장해 주면 가겠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1940년 봄, 문경공립보통소학교 교사를 사직했다. 교장과 대판 싸웠기 때문이었다. 교장은 학생들의 두발 상태가 엉망이라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가했다. 그러자 박정희 훈도는 교장에게 대들었다. "학생들 두발이 엉망인 것은 머리를 깎을 돈조차 없이 가난하기 때문"이니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교장은 조선인의 궁핍한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박정희는 교사생활을 때려치웠다.
박정희는 1940년 4월, 만주국 육군 신경군관학교 혈서를 쓰고 입교했다. 그리고 2년 후, 신경군관학교 예과를 수석 졸업했다. 이어 1942년 10월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다. 일본 육사 제57기 졸업성적은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총 2천511명 중 1등이었다.(한국 측 기록은 3등으로 되어있음.) 당시 일본육사 57기생이 2천500명이 넘었던 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초급 장교들이 너무 많이 전사하자 초급지휘관을 대량으로 양산하기 위해서였다.
1944년 7월, 박정희는 만주군 소위로 임관, 만주군 열하성 제6군관구 제8보병단에 부임했다. 그가 근무했던 곳은 만주군의 후방인 열하, 즉 지금의 승덕(징더)이다. 만주 생활 불과 1년여, 그러나 만주의 경험은 만철에 근무했던 나카소네 요시히로, 기시 노부스케(아베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 등 일본 총리 등에게서 한일경제협력 차관 유무상 7억달러를 받을 때 유리하게 작용한다. 일본에는 만철 근무자들끼리의 모임이 별도로 있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험지에서의 동료의식이 평생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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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
'만철을 사랑하는 모임', 이 모임은 2013년이 되어서야 해산했다. 무려 70년 이상을 유지했다. 해산 이유도 회원들의 고령화, 사망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제국 육군 만주군 중위 박정희는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자 조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는 이승만, 상하이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했다. 이병철도 새로운 나라에서 마음껏 사업을 펼칠 구상을 시작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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