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초량왜관과 칠곡왜관…초량왜관, 10만평에 건물 수십 개…왜인 500여명 상주했던 '무역 중심지'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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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28 07:44  |  수정 2023-07-28 07:45  |  발행일 2023-07-28 제35면
노략질 반복하던 '골치 아픈 이웃' 일본
사무역 허락한 뒤 무역 파트너로 급성장
동래·기장지역 일본산 상품 유행하기도
우리나라 역관 중 밀무역 통해 부 축적
변승업·김근행 등 조선역관의 상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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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 무관화가 변박이 그린 초량왜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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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가대·조선통신사 및 문위행 사절단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해신제를 지냈던 곳. 〈향토문화대전〉

조선왕조는 나라를 세울 때부터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고 종국에는 왜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역사상 네 번의 왜란을 겪었고 급기야 임진년 왜란에는 15만 대군이 쳐들어와 전 국토가 유린당했다. 왜인은 왕조 내내 골치 아픈 이웃이었다. 노략질을 염려해 쓰시마 영주에게 매년 세사미(歲賜米) 100석을 주어 달랬고 상인에게 사(私)무역을 허락했다. 사무역을 하기 위해 우리 땅에 무상으로 지은 왜인의 숙소가 왜관이다. 삼포의 통상은 임란 후 부산포를 통해 재개됐다. 왜관은 두모포왜관 70년을 거쳐 초량왜관 200년으로 개화기까지 존속했다. 부산항의 출발은 왜관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왜관이란 이름은 생뚱맞게 구한말 경부선철도가 부설되면서 칠곡군에 생겼다.

◆서울왜관 동평관

옛날 부산은 동래부사가 고을을 다스리고 경상좌수사가 바다를 지켰다. 좌수영 아래에 부산진·다대진·가덕진 등 6진이 있었는데 큰 진은 첨사, 작은 진은 만호가 맡았다. 부산진은 범일동에 있었고 좌수영 자리가 오늘날 수영이다.

조선전기에는 일본사신, 유구국(오키나와)사신, 여진족사신이 매년 동지 또는 정초에 서울로 와서 국왕에게 신년하례를 올렸다. 우리나라 동지사가 중국 가서 황제에게 새해인사하고 신년 책력을 받아오듯 이웃 나라에서도 우리나라로 사절을 보냈다. 조정은 이들을 객사(客使)라 부르며 별도 의례를 만들어 조회에 참석시켰다. 일본사신에게는 종2품 반열(참판급)에 서게 했다. 이때 일본사신이 머문 숙소가 동평관이다. 동평관은 태종 때 지어져 200년간 존속했으며 인현동에 있었고 옛날에는 이 일대를 왜관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표지석만 있다. 일본사신은 1589년까지 서울에 71번 왔다.

◆두모포왜관

임란 이후 왜인의 내륙 출입은 금지됐다.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임란 때 길잡이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사신은 서울에 올 수 없었고 왜관의 개시무역과 통신사 파견협의도 동래부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동래부사는 75개 도호부 중 함경도 종성부사와 더불어 정3품 당상관이 보임되는 중요한 자리였다.

기유약조로 통상이 재개되면서 왜인을 관리하기 위해 부산진 옆 두모포 어촌에 왜관을 지었다. 지금의 수정동 동구청 일대로 1609년부터 1678년까지 70년간 존속한 두모포왜관이다. 두모포는 선창이 얕고 부지가 협소하며 해풍이 거세 이전 요구가 처음부터 있었고 우리나라도 부산진성과 가까워 불편했다. 1670년 현종은 영의정 상촌 신흠의 손자로 훗날 예조판서를 지낸 신정을 동래로 보내 왜관 이전을 살펴보게 하고 초량이전을 허락했다. 이때 신정이 지은 부산 절승시가 많이 남아있다. 왜관이 초량으로 이전되자 두모포왜관을 옛 왜관, 고관(古館)이라 부르며 고관로, 고관입구 지명이 생겼다.

◆초량왜관

일본 목수를 불러 수년간 공사 끝에 1678년(숙종4년) 초량왜관이 완성됐다.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10만평 부지 위에 수십 동의 건물이 들어섰고 500여 왜인이 상주했다. 모두 남성이다. 왜관의 우두머리를 관수라 했으며 매월 6회 개시(開市)무역이 열리는 개시대청을 지었고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왜인과 조선인 사이 사적 왕래는 금지됐다. 오늘날 중앙동·광복동·남포동·대청동 일대이다. 왜관 밖 동쪽에 초량객사 대동관을 지어 일본사신이 오면 반드시 들러 망궐례를 올리게 했다. 객사의 위치는 영주동 봉래초교 자리이고 인근에 역관의 집무소인 성신당이 있었다.

3·8일날 5일장으로 열리는 개시무역에 일본상인은 인삼, 소가죽, 중국산 비단, 견직물 등을 사갔고 동래상인은 은, 구리, 납, 염료 등을 수입했다. 일본산과 중국산 물품의 중계무역도 이루어졌다. 또 왜관 살림살이에 필요한 채소, 과일, 생선을 공급하는 아침장(朝市)이 매일 정문 앞에 열렸다. 조시 상인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남자가 파는 물건은 사 가지 않고 여성이 파는 물건은 질이 나빠도 잘 팔렸기 때문이다. 젊고 예쁜 여성이면 가지고 간 물건 값을 두 배로 쳐주니 어물 채소를 파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딸을 파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 왜관 인근에 옛 초량촌이 있었는데 왜관의 일본남성과 초량촌의 조선여인 사이 매춘이 일어나 말썽이 생기자 초량촌 민가 90여 가구를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이때 형성된 마을이 신초량으로 현재의 초량이다.

◆왜풍과 초량왜관사(詞)

실학자 성호 이익의 외증손으로 신유사옥에 연루돼 김해에서 24년 귀양살이한 이학규가 1811년 유배 10년차에 초량왜관을 구경하고 초량왜관사와 금관죽지사를 지었다. 그는 왜관으로 왜풍이 불어 19세기 동래·김해·기장 사람들이 일본산 부채, 거울, 양산, 칼, 도자기, 음식 등 일본문화를 경험하고 즐기는 일상을 시로 나타냈다.

"승가기(스키야키) 국물은 기녀보다 낫다는데 만드는 법이 일본에서 전해졌네. 신선로 국물이 승가기만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라고 스키야키가 부산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이 됐음을 노래했고 "초하루 남호에서 치마 빨고 돌아갈 때 일본 양산으로 햇빛 가리며 천천히 걸어가네"라고 일본 양산을 은근히 뽐내는 여인의 마음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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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에 있는 역관의 해난순직 위령비인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문위행과 사행선의 침몰

조선무역을 가업으로 물려받은 쓰시마 영주와 왜관을 감독하는 동래부사 사이에는 정기적으로 사절단이 오갔다. 에도막부로 가는 조선통신사와 달리 쓰시마 영주에게 보내는 사절단을 문위행(問慰行)이라 했다. '묻기도 하고 위문가는 행렬'이란 의미로 쓰시마 영주가 에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일본정세를 알아볼 겸 보냈다. 통신사는 12회, 문위행은 54회 갔다. 통신사 인원은 500명, 문위행은 100명 내외이다. 문위행은 당상역관이 정사였고 여러 번 다녀온 역관도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사신을 차왜(差倭)라 했다. 상인이 아니라 공무로 오는 왜인이라는 뜻으로 대차왜, 소차왜, 별차왜 등 중요도와 임무에 따라 다양하게 불렀고 조정에서는 접위관을 임명해 동래부사와 함께 이들을 상대했다. 성신당에는 일본어역관 30여 명이 상주했고 가장 고위직이 훈도, 그다음이 별차, 소통사이다.

문위행 사행선이 침몰하는 해난사고가 두 번 있었다. 1703년(숙종29) 훈도 한천석이 이끄는 사행선이 쓰시마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112명 사절단 전원이 익사했고 1766년(영조42) 당상역관 현태익이 이끄는 사절단이 오륙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10명만 구조되고 93명이 익사했다. 쓰시마 한국전망대 옆에 위령비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가 세워져 있다.

◆역관의 밀무역

역관은 통역이 주 업무였지만 대부분 밀무역에 관여했다. 밀무역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역관집안이 출현했다. 밀무역의 주된 상품은 인삼과 쌀. 일본산 은이다. 역관가문이 등장하니 밀무역 규모도 커졌다. 신유한의 사행일기 해유록에 '밤에 역관의 행장을 수색했더니 권흥식의 자루에서 인삼 12근과 은 2천150냥, 황금 24냥, 오만창에게서 인삼 한 근이 나와 두 역관을 결박하고 처단하기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공식 사절단에도 밀무역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부자였지만 평생 검약하게 살면서 나라가 필요할 때 공을 세워 중인신분으로 종2품 가선대부까지 올라간 두 사람의 일본어역관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변승업과 김근행이다. 변승업은 부의 흐름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가진 인물로 연암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의 모델이 됐고 김근행은 효종의 북벌 준비에 청나라 몰래 일본에서 유황, 화약 등 군수품을 수입하고 초량왜관의 건립비용을 일부 조달했으며 과욕은 화를 부른다며 평생 절제된 삶을 살아 조선역관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칠곡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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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왕조실록에 왜관이 450회 나오지만 칠곡왜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성주읍지인 경산지에 조선초 삼포가 개항되고 일본사신이 낙동강을 거슬러 서울로 갈 때 강 중류인 칠곡 금산리에 일시 유숙하는 왜인숙소가 있었다는 기록과 인동읍지에 약목 관호리를 왜관진으로 표시한 지도가 있으니 칠곡 낙동강변에 한때 왜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역을 주로 하는 삼포왜관과 달리 사신의 임시숙소였고 임란 후 왜인의 내륙출입이 금지되자 없어졌다.

조선후기 칠곡 부락을 왜관리로 지칭한 적이 없는데 오늘날 왜관읍이 존재하는 이유는 구한말 일본자금으로 부설한 경부선에 역명을 붙일 때 칠곡 기차역을 왜관역이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양반은 철도의 반촌 통과를 결사반대했고 조선을 침탈한 일본관리는 자신들의 옛 흔적을 나타내려고 억지로 왜관 이름을 붙였다. 약탈과 회유의 왜관사에서 칠곡왜관은 존재조차 희미하고 왜관은 그리 좋은 이름이 아니다. 금오산 자락에는 길재, 이원정 같은 큰 인물이 나오고 현대에는 국무총리가 세 분이나 배출됐다. 삼국유사면, 문무대왕면도 생겼는데 왜관읍 100년은 어쩐지 생뚱맞다. 조선통신사는 1811년, 문위행은 1854년에 막을 내렸다. 일본이 개항되고 조선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정한론이 일어나고 조선은 침탈당했다. 왜관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국제관계에서 힘의 우위가 무엇인지를 시사해주고 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dk6716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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