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가는 청정관광1번지 산소카페 청송 .3] 주왕의 전설 품은 주왕산국립공원

  • 류혜숙 작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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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8-30 08:03  |  수정 2023-08-30 08:04  |  발행일 2023-08-30 제16면
기암절벽·웅장한 폭포…주왕의 전설따라 선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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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주왕산의 얼굴이자 상징인 기암단애는 대전사 앞마당에서 바라볼 때 가장 묵중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주왕산. 청송에서 가장 이름난 산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그대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갈 수 있으리라' 했을 만큼 예부터 이름난 산이다. 옛날에는 바위로 병풍을 친 것 같다 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 했다. 골 깊어 숨어 살기 좋다 하여 대둔산(大遯山)이라고도 했으며, 신라의 왕족 김주원(金周元)이 머물렀다 하여 주방산(周房山)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지금 저 산의 이름을 차지한 이는 진(晉)나라의 후예 주왕(周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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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이 숨어 지냈다는 주왕굴의 내부 모습.

◆주왕이 숨어 살던 골 깊은 산, 주왕산

전설에 의하면 주왕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진나라의 재건을 위해 반역을 일으키다 실패하여 이곳으로 숨어들어왔다. 당은 신라에 주왕을 잡아 달라 요청하였고, 신라는 마일성(馬一聲)장군과 그의 형제들로 하여금 주왕을 토벌케 했다. 산 깊은 굴속에 숨어 있던 주왕은 결국 마 장군의 화살에 최후를 맞았고 이에 마 장군은 산의 첫 봉우리에 깃발을 꽂았다. 그 봉우리가 바로 기암이다. 대개 '기암'이라고 하면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떠올리지만 기암의 기(旗)는 깃발을 의미한다. 기암은 주왕산의 들입에서부터 사하촌을 지나오는 내내 시선을 압도한다. 주왕산의 얼굴이고 상징이며 항구적인 위용이다. 주왕산국립공원 초입에 자리한 청송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탐방안내소도 기암단애를 형상화했다. 기암단애는 주왕산의 대표적인 들머리인 대전사 앞마당에서 바라볼 때 가장 묵중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 12년인 672년 의상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고려 태조 2년인 919년에 눌옹이 창건했다고도 하는데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딴 것이라 전한다. 지금 기암의 꼭대기에는 깃발 대신 소나무와 관목이 스스로 자라고 있다.

천과 나란한 길을 오른다. 천은 주방천, 계곡은 주방계곡이다. 대전사 입구를 지나면서 천의 품은 점점 좁아지고 상쾌한 그늘에 싸인 산길은 부드럽게 사각거린다. 천변에는 수달래 관목들이 듬성한데, 해마다 5월이면 진달래보다 더 짙은 핏빛의 수달래가 무리 지어 피어난다. 주왕이 피 흘리며 죽을 때 주방천은 온통 피로 물들었고 그 이듬해 피어난 것이 수달래였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수달래를 주왕의 넋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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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교를 지나 시루교에 이르면 하늘을 향해 기립해 있는 시루봉을 만날 수 있다.

자하교를 건너면 주왕굴 가는 길이 있다. 약 300m쯤 가면 먼저 주왕암(周王庵)에 닿고 그 오른쪽 골짝에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협곡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그 끝에 주왕이 숨어 지냈다는 주왕굴이 자리한다. 주왕은 이곳에서 잠깐 고개를 내밀었고 그예 마 장군에게 들켜 화살을 맞았다. 굴 입구 한쪽으로 물줄기가 흐른다. 큰 비가 내리면 폭포로 돌변하고 한겨울에는 얼음벽이 된다. 주왕암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난 샛길을 오르면 주왕의 군대가 병장기를 보관했다는 무장굴(武藏窟)이 나온다. 무장굴에서 바라다보이는 기암단애의 모습은 대전사에서 보는 모습에 비견될 만하다. 자하교 쉼터에서 용추폭포 방향으로 조금 가면 왼쪽에 연화굴 가는 이정표가 있다. 주 등산로에서 이탈해 가파른 산길을 200m 정도 오르면 바위의 사원과 같은 연화굴(蓮花窟)이 나타난다.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성불했다는 곳이다. 주왕굴, 무장굴, 연화굴은 모두 고도 390m에 위치하며 주왕산의 형성과 때를 같이한다.


무장굴·주왕굴·연화굴 등 곳곳에 주왕의 자취
주왕 토벌한 신라 馬장군 '기암'에 깃발 꽂아
용추협곡, 옛 선비들 신선세계 길목으로 여겨
사라진 산속 마을 내원동 한때 100가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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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천을 따라 북동 방향으로 약 1㎞ 이어지는 용추협곡.

◆주왕산의 가슴, 용추협곡

자하교를 지나면서부터 계류에 발 담근 바위들이 천천히 커지고, 그리 멀리 않은 능선에 잿빛 바위들이 고개 들기 시작한다. 처음엔 천천히 다가오더니 어느덧 어깨를 밀어 넣듯 바짝 다가와 이내 둘러선다. 막막히 사로잡힌다. 철갑부대에 에워싸인 듯하다. 왼쪽으로는 연꽃을 닮은 연화봉과 병풍바위가 잇대어지고, 오른쪽으로는 망월대로부터 급수대를 거쳐, 학소대로 연결되는 암석의 단애들이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다. 무리 지은 듯하나 따로이고, 서로가 서로를 수도하듯 면벽하면서도 기세는 제각각이다. 우듬지는 까마득하고 발아래는 먹먹하다. 추상같은 기상에 걸음이 허영해진다. 자하교에서부터 용추폭포까지, 주방천을 따라 북동 방향으로 약 1㎞ 이어지는 이 계곡을 용추(龍湫)협곡이라 한다. 옛 선비들은 이 계곡을 신선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생각했고, 좁은 문을 지나 다다를 수 있는 무릉도원이라 여겼으며, 청학이라 불리는 기이한 새가 산다 하여 청학동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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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성을 향해 나아가는 함선의 현두처럼 솟구쳐 있는 급수대.

급수대(汲水臺)는 북두성을 향해 나아가는 함선의 현두처럼 솟구쳐 있다. 주왕산으로 피신해 들어온 신라의 김주원이 절벽 위에 대궐을 짓고 식수를 얻기 위해 계곡의 물을 퍼 올렸단 전설이 있다. 학소대는 협곡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데 빛 가득한 오후에도 슬픔처럼 응달져 있다. 하늘 가까운 바위 위에, 옛날 청학과 백학 한 쌍이 살았다 전해진다. 어느 날 사냥꾼이 백학을 쏘았고, 홀로 남은 청학은 슬피 울며 바위 주변을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노애 류도원은 '학은 떠나 둥지가 비었으나 봄날 저녁 구름 사이로 울면서 날아갈 때가 있다'고 했다. 시루교에 이르면 시루봉이 거석의 기둥처럼 하늘을 찌르며 기립해 있고 그 양쪽으로 거침없는 기세로 시립한 암벽들이 주왕산의 늑골처럼 드러나 있다. 자하교에서 시루교(학소대)까지는 계곡 길 외에 약 1㎞의 '자연관찰로'가 조성되어 있다. 급수대를 가장 상세히 볼 수 있는 길이고 주왕산의 식생과 동물들 등에 대한 안내판도 만날 수 있다. 주왕암 근처의 망월대는 대전도군과 백련낭자가 달을 보면서 향수를 달랬던 곳으로 연화봉과 병풍바위, 그리고 급수대의 옆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최고의 전망대다.

◆주왕산의 심장에서 쏟아지는 폭포들

학소교를 지나면 엄청난 암석 단애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길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단애의 틈을 비집고 나아간다. 가까이 바짝 다가서는 철갑 같은 암석들에 붙잡혀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해발 320m 지점, 주왕산의 가슴우리 뼈와 같은 그 속, 그 한가운데에서 폭포가 쏟아진다. 용추협곡의 하이라이트인 용추(龍湫)폭포다. 폭포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선녀탕, 구룡소 등의 포트홀이 발달되어 있다. 폭포는 놀란 심장처럼 쾅쾅 울리며 계류를 뿜어낸다. 폭호는 시리도록 맑으나 그 깊이는 쉬이 가늠되지 않는다.

용추폭포를 지나면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약 1㎞ 정도 오르면 절구폭포로 가는 샛길이 나온다. 가메봉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흐르는 사창골 계곡길이다. 사창골은 옛날 대전사의 창고가 있던 골짜기로 일제 때는 참나무로 목탄을 생산하던 곳이라 한다. 절구폭포는 멀지는 않지만 깊은 골의 막다른 곳에 자리한다. 계곡물이 처마처럼 생긴 바위에서 떨어져 절구처럼 생긴 바위에 담겼다가 다시 낮은 바위를 타고 쏟아져 절구폭포다. 절구폭포는 주왕산에서 유일하게 물에 손 담글 수 있는 폭포다. 수심도 얕다.

해발 약 400m 지점, 주왕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용연(龍淵)폭포가 있다. 폭포는 2단으로 떨어지는데 상부폭포의 양옆 단애에는 공 맞은 반죽처럼 움푹 파인 하식동굴들이 있다. 폭포 아래로 떨어진 물이 소용돌이칠 때 튀어 오른 물이 측면에 부딪히고, 오랜 시간 물방울을 맞은 벽은 어느덧 동그랗게 닳아 굴 모양으로 파였다. 끊임없이 준동하는 폭호는 청초하다. 언뜻 얕아 보이는 폭호는 갑자기 절벽처럼 깊어진다. 4m라는 수심이 가뭇없다. 용연폭포에는 용이 살았다고 하고, 폭포의 깊은 곳은 바다와 통해 있다고도 전해진다. 용추·절구·용연 폭포는 1930년대부터 80여 년간 1·2·3 폭포로 불렸다. 명칭에 '용(龍)'자를 쓰지 못하도록 일제가 강제로 변경한 것이었다. 이제 용추, 절구, 용연의 이름을 크게 불러본다.

대전사에서 용연폭포까지는 3.4㎞ 정도다. 용연폭포 조금 위에는 가메봉과 금은광이삼거리 갈림길이 있다. 가메봉 방향으로 1㎞쯤 가면 사라진 마을 내원동이다. '주왕산지'에 '시내를 따라 십리 길이 구비마다 밝고 환하다'며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이한 승경이 있는 줄 알지 못하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고려 중기부터 사람이 살았고 일제시대에는 100여 가구가 넘었으며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분교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지금은 휑한 집터와 낮은 돌담, 그리고 과거를 전하는 이야기만 남아 있다. 내처 가메봉에 다다르면 큰 세상이 열린다. 저 멀리 동해가 펼쳐져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청송군. 청송 유네스코지질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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