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칠성시장 수제비

  • 신민건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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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8-31  |  수정 2023-08-31 07:45  |  발행일 2023-08-31 제16면

[문화산책] 칠성시장 수제비
신민건<대구문화예술진흥원 주임>

영화관에서 교대 근무를 하던 때에 새벽과는 꽤 가까운 사이였다. 어느 새벽엔 힘겹게 뜬 눈으로 첫차를 기다렸고, 어느 새벽엔 노곤한 몸을 술로 재웠다. 새벽을 마주하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허기가 무척이나 졌는데 칠성시장 행복주방 앞 가판의 수제비가 지친 발길을 자주 홀리고는 했다.

수제비와의 역사는 아버지 손을 잡고 목욕탕에 다니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바나나맛 단지우유 같은 의미였지만 조금 더 따뜻하고 포슬포슬하던 수제비. 무표정한 아지매의 투박한 손길에서 뜨끈한 수제비가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나오면 푸짐한 그것을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의자에 앉아 바닥에 발이 잘 닿지 않아도 2천원짜리 수제비 한 그릇을 숫제 비우며 배가 빵빵해졌다. 수제비 한 그릇이 3천500원이던 또 어떤 때엔 술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헤매다 겨우 가판을 찾아가기도 했다. 한 그릇을 먹고 인심 듬뿍한 한 그릇을 더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제 새벽과는 그리 친하진 않지만, 왕왕 수제비가 그리워지면 게으른 몸을 일으켜 칠성동 새벽시장으로 향한다. 밤새 술을 마신 취객들과 시장을 여는 상인들 사이에서 수제비 한 그릇을 주문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수제비 한 그릇 값은 그제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그릇의 수제비가 벅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나이가 되어 변해버린 스스로를 보다가도 변함없이 새벽을 데우는 수제비 한 그릇을 먹다 보면 마음이 따스해지곤 한다.

여름 끝 무렵 장마 사이로 갈바람이 분다. 시나브로 뜨끈한 수제비 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이 왔다. 가을 녘 문턱에 서서 칠성시장 수제비를 생각하며 투박한 졸시 하나를 적어 본다. 유난했던 여름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뻘밭을 메우듯 밀려드는 보랏빛 하늘의 경계를 따라/ 밤을 마감하는 이들과 아침을 시작하는 이들이 스쳐 가는/ 칠성의 새벽시장이 열리면/ 차도와 인도 사이 가판 수제빗집에 앉아/ 수제비 한 그릇을 시켜놓고 추운 새벽을 넣어 따스히 녹여 먹어보라/ 뜨끈하게 우린 며르치 대파 육수며/ 뚝 뚝 떼어내어 익은 쫀득한 수제비며/ 포슬포슬 바스러지는 감자며/ 양념장에 절은 대파 줄기며/ 아삭하게 씹히는 오이고추며/ (청양고추는 비싸서 받지 못한 아쉬움이며)/ 한 그릇 다 먹어가다 보면 한 그릇 더 퍼주는 배부른 인심까지도/ 더할 나위 없는 한 끼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대/ 칠성의 새벽시장에 발이 닿는다면/ 가판에 앉아 수제비 한 그릇 먹어보라./ 밤을 헤매어 걸어온 이든 아침을 시작하려 나서는 이든/ 수제비 한 그릇을 두곤 모두가 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신민건<대구문화예술진흥원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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