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직터뷰] 개그맨 겸 대학교수 김홍식씨 "만만하지 않은 직업 '김샘'…폰게임보다 더 흥미 있는 수업 다짐"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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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27 08:32  |  수정 2023-11-29 15:44  |  발행일 2023-09-27 제25면
개그 캐릭터 '김샘' 내 인생 큰 재산
학생·청중 입맛 맞추는 주문식 강의
학부모 과잉 민원은 가정교육 문제
교권이든 인권이든 과유불급 새겨야
좌우명 '그럴 수도 있다'로 자기최면
스트레스 덜 받고 사는 행복감 원천

김홍식2
김홍식씨가 화이트보드에 적은 인생 좌우명 글귀 '그럴 때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를 가리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씨는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이 글만 떠올리면 웃고 넘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너그 아부지 뭐하시노?" 선생님들이 대놓고 이렇게 말한 시절이 있었다. 영화 '친구'에서 담임교사를 연기한 배우 김광규의 명대사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오래전 KBS TV '폭소클럽'의 '떴다 김샘'에 출연한 개그맨 김홍식의 이 대사가 귀에 더 익다. 얼마 전 TV 토크 프로그램에 나온 그를 봤다. 재담(才談)이 여전했다. 하 수상한 작금의 세상, 당최 웃을 일이 없다. 문득, 개그맨인 그는 웃으며 살고 있는지, 웃으며 사는 방법은 무엇인지 얘길 듣고 싶었다. 그의 인생 스토리도 함께. 틀에 박힌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관계가 아닌 오랜 개인적 인연으로서.

그를 만났다. '떴다 김샘'에 나올 때가 서른다섯, 지금은 쉰넷이다. 트레이드 마크인 '헌팅 캡'은 그대로였다. 이젠 턱수염 말고도 콧수염도 있다. 또 어엿한 대학교수가 돼 강단에 서고 있다. 근데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인생의 등불과도 같았던 어머니가 얼마 전 돌아가신 후여서다. 그는 상을 치른 뒤 한 달간 매일 어머니 묘소에 들렀다고 한다. "약속엔 10분 일찍 나가 기다리고, 남한테 뭔가를 받으면 꼭 배로 돌려줘래이." 생전 어머니가 늘 강조하신 말이라고 한다. 그렇게 숙연한 분위기에서 첫 질문을 던졌다.

▶대학에선 무역학도, 사회 첫발은 이벤트 MC. 흔치 않은 진로였습니다.

"글쎄요. 천상 '마이크 체질'이랄까. 어릴 때 소풍·운동회 장기자랑 사회를 도맡았죠. 무역학과(영남대 87학번)는 그냥 취직 잘된다 해서…. 입학 후 첫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회자를 본 순간 '히어로'처럼 느껴졌어요. 강렬한 그 첫인상이 절 이벤트 MC로 이끌었죠. 초·중·고 때 했던 가락도 있어서. 몇 가지 스킬을 익혀 MC 알바를 뛰었죠. 학과·동문회 페스티벌…. 열심히 쫓아 다녔습니다. 마냥 대학 등 젊은 층 행사를 할 순 없었죠. 졸업 후엔 '무대'를 바꿨어요. 회갑·칠순·팔순 잔치 등으로. 그렇게 제 첫 명함을 파게 된 겁니다.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트로트 가수 이찬원도 같은 영남대 상대 출신인데, 재학 중 이벤트 MC로 이름을 날렸다네요. '동종업계 선후배' 사이인데, 언젠간 한번 만나겠죠.(웃음)"

▶'김홍식' 하면 '폭소클럽'의 '떴다 김샘'이죠.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는데.

"'궁하면 통한다' 옛말 틀린 게 없어요. 2004년,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죠. 지인에게 큰돈을 빌려주는 바람에…. 걱정하는 아내에게 '1년 안에 답을 낼게'라고 큰소리쳤죠. 믿는 구석도 없이. 정 안되면 쪽지('성공해서 돌아올게, 미안해') 써놓고 떠날 생각도 했어요. 그러던 중 '폭소클럽'에 평소 존경하는 MC 선배 한 분이 나오게 됐어요. 근데 무대에서 진땀을 흘리는 선배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어요. '내가 만약 저 무대에 선다면…' 평소 운전 중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해요. '김샘' 캐릭터도 운전 중에 나온 것입니다. 학창시절 별의별 선생님이 다 있었잖아요. 영화 '선생 김봉두'처럼 돈 밝히는 선생님도 있었고, 영화 '친구'의 단순무식한 선생님도 있었고. '두 캐릭터를 짬뽕해 보면 어떨까.' 폭소클럽 담당 작가에게 제안했죠. 결국 'OK' 사인을 받아 코너를 따냈어요. 결과는 대박이었죠.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내 인생의 큰 재산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떴다! 김샘' 인기에 힘입어 '투사부일체' 등 영화에도 나왔죠. 큰물에서 계속 놀 수 있었는데, 왜 대구에 남았는지.

"제가 전국구 스타가 된다고 쳐요. 대구를 떠나 서울에 살아야 하고, 친한 친구도 자주 만나기 어렵고. 많은 걸 포기해야겠죠. '가늘고 길게 살자'고 다짐했죠. '팔자를 고쳤어도 난 변한 게 없다.' 그런 모습을 주위에 보여주고도 싶었어요. 저보다 앞서 방송에 진출해 변한 사람을 많이 봐 온 터라,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죠."

▶대학교수로서 인생 3라운드를 펼쳐가고 있습니다. 학교 생활은 재미있는지.

"2009년 개그맨 남희석씨 추천으로 강의(대경대 초빙교수)를 시작했죠. 지금은 사학연금을 받을 수 있는 전임교수가 됐고요. '공동체 질서와 삶' '대인관계' '리더십'을 가르쳐요. 어때요, 어울리나요? '짝퉁 샘'에서 진짜 선생이 됐지요.(웃음) 처음엔 직업병인지, 과거 '김샘' 이미지로 학생들을 웃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연차가 쌓일수록 '재미'가 다가 아니더라고요. 짧은 한 시간이라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그래서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어요. 수업 내용 중 뭐가 좋고 안 좋은지를. 수업 중 휴대폰 게임 하는 친구를 꾸짖을 순 없어요. '내 수업이 지루하다'는 방증 아니겠어요. 게임보다 더 흥미를 주는 교수가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지요. 아무튼 선생이라는 직업, 결코 만만치 않아요. 그렇지만 다양한 분야에 있는 졸업생들을 보면 큰 보람을 느껴요."

▶요즘 '일타강사 김샘'으로도 유명하던데요.

"다 '김샘' 캐릭터 덕분이죠. 강연 활동의 피크 시절은 지났죠. 지금은 '하향 안정화'에 있지만 여전히 소중한 밥벌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 강의의 특징은 '주문식'이라는 점입니다. 의뢰 기관에 '원하는 주제'를 먼저 물어 보지요. 이래야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 오거든요. '입맛'을 맞춰 주니까. 청중이 청소년이라면 미리 아이돌 가수 등 그들의 최애 관심사도 함께 공부해 놓고요. 강연 집중도가 확 달라져요. 과거 정보통신부에서 한 강연이 변곡점이 됐어요. 신문 기사에 '김샘, 정보통신부 최고 강사로 등극하다'라는 제목이 뽑혔어요. 강의 평점이 무려 96점. 직전 강연이 황우석 박사였는데 85점을 받았거든요. 강연가로 클 수 있는 기폭제가 됐죠. 이후 관공서 강연 의뢰가 줄을 잇기 시작했어요. 역시 '인생은 타이밍'입디다."

▶코로나 팬데믹 땐 강연이 없어 답답했겠습니다.

"직격탄을 맞았죠.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니. 매출 감소 '100%'. 미치겠더라고요. 학교 말고 내가 뭐라도 일을 더하고 있다는 걸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장 수입도 급감했고요. 이만하면 'N잡러 강박증'이죠? 결국 큰 딸과 함께 밤에 택배 알바를 했답니다. 몸은 고됐지만 저는 물론 딸에게도 '돈보다 값진 그 무엇'을 몸소 느끼게 해 준 일이었죠. 우리, 더 늙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합니데이.(웃음)"

▶교육자로서 최근 이슈인 '교권 추락'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겠네요.

"오래전부터 학부모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고 싶었어요. 모든 게 가정교육인 것 같아요. 좀 야박한 얘기 같지만, '학부모 과잉 민원'도 그 학부모 윗대로부터의 가정교육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봐요. 과거 사립 중고교 교장 모임에서 '공교육과 학부모' 주제의 강의를 제안한 적이 있어요. 교장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동석한 교육계 윗분에게 건의를 했죠. 근데 그분이 저를 힐끗 보더니 '내가 얘기를 해도 안 듣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더라고요. '하물며 니가 뭐라고'라는 말이 생략된 뉘앙스였죠. 솔직히 자존심 상했죠. 교권이든, 학생 인권이든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새겨야 합니다. 임시처방격으로 어느 한쪽을 옹호하면 다른 한쪽에서 문제가 불거질 수 있잖아요. 양자 관계가 '풍선'은 아니잖아요. 함께 존중돼야 하니까. 서로가 지키지 않으면 안될 강력한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중요합니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 몫이겠지요"

▶과거 영남일보 칼럼에서 '인생 뭐 있나'라는 화두를 던졌지요. 김샘표 '웃으며 사는 법'은 무엇인지.

"'그럴 때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 제 카카오톡 대문에 적힌 글입니다. 인생 좌우명이죠. 제 행복감의 원천이기도 하죠. 타인들 때문에 상처받아 화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럴 때마다 이 글을 떠올려요. 귀신같이 그런 감정이 사라진답니다. 습관적으로 제 자신에게 최면을 걸다시피 하니 남들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사는 것 같아요. 기자님도 한 번 실천해 보세요. 인생 뭐 있나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팬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식당 등에서 가끔씩 저를 알아보는 분들에게 물어 봐요. 제가 어떤 이미지였냐고. '촐랑촐랑 까불지 않고도 대중을 즐겁게 해줬다'고 덕담을 해주더라고요.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언젠간 잊히겠지만 '골치 아픈 일도 쉽게 풀어주는 선생이었다'라고 기억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창호 논설위원 leec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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