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한글날 단상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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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09 07:00  |  수정 2023-10-09 07:00  |  발행일 2023-10-09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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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논설위원

기자가 쓰는 글 가운데 이른바 '캘린더(calendar) 기사'라는 게 있다. 언론계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은어(隱語)다. 연중 각종 기념일을 즈음해 쓰는 맞춤형 기사를 일컫는다. 가령, 어린이날엔 어린이 인권을, 현충일과 6·25전쟁일엔 호국보훈을 주제로 기사를 만들곤 한다. 해마다 '그날'을 맞으면 의무감에 취재를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땐 "맨날 똑같은 얘기, 좀 쌈박한 주제 없어?"라는 데스크의 질책을 피하기 어렵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제 577돌 한글날. 고민이다. 뭘 써야 할지. 염치불고(廉恥不顧)다. 다시 세종 임금을 소환한다.

작금, 세종 임금에게 송구스러운 게 뭘까. 무분별한 외래어, 한글 파괴하는 청소년 언어, 여전한 일본어 잔재…. 어디 한두 가지일까. 글은 그렇다 쳐도 모골을 송연케 하는 '막말'은 세종 임금에게 가장 면목 없는 짓이다. 우리 사회 전방위에 퍼져 있다. 특히 정치인의 막말은 뉴스 단골이 된 지 오래다. 막말 정치인은 자성(自省)은커녕 오히려 '한 건 했다'는 태도다. 잘못된 자기 과시와 소영웅주의에 다름없다.

무수한 막말 가운데 '인간 쓰레기'라는 게 있다. 해만 끼치고 아무 쓸모 없는 이를 일컫는다. '인간 부류 가운데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 있다. 그냥 쓰레기이니까 조심하면 된다'('강신주의 감정수업' 중). 틀린 말이 아니다. 상대가 누가 봐도 무뢰한(無賴漢)이라면 적어도 속으론 '인간 쓰레기'라고 여겨도 문제는 아닐 터. 근데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인간 쓰레기'로 부른다면 온당한 언사(言辭)일까. 당치않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정치판에서 서슴없이 내뱉어진다. 얼마 전 탈북민 출신의 태영호 국회의원이 그 소리를 들었다. 북한 인권에 대한 야당의 무관심을 비판하자 박영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북한에서 쓰레기가 왔네"라고 했다. 유시민씨도 최근 2030 남성이 이용하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해 "쓰레기통 속에 가서 헤엄치면서 왜 인생 일부를 허비해야 하냐"고 했다. 박 의원과 유씨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알고 보면 '인간 쓰레기' 막말의 원조는 북한 아닌가. 고(故)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비서가 과거 "김일성은 속물"이라는 말을 했다가 '인간 쓰레기'라는 비난을 들었다. 태영호 의원도 김정은 비판 자서전을 냈다가 "천하의 인간 쓰레기"라는 욕말을 들어야 했다. 북한발(發) 막말에서 '인간 쓰레기'는 그래도 점잖은 축에 속한다. 과거 북한은 우리 정부를 향해 '겁 먹은 개' '삶은 소대가리'라고도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최근 윤석열 대통령을 '놈' '바보' '멍텅구리'라고 했다.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급기야 북한 방송은 아시안게임 남북 여자축구 결과를 전하면서 한국을 '괴뢰'라고 부르고 표기했다. 북한 막말의 '화룡점정'을 보는 듯하다. 그렇다고 북한을 향해 '북괴'라고 맞대응할 순 없다. 똑같이 '언어 황폐 국가' 소리를 들으면 안 되니까.

아직도 막말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정치인이 많다. 그런 자는 정치판에서 소외 받아야 마땅하다. 과거 "문재인 모가지 따는 건 시간 문제"라고 막말을 해 논란을 일으킨 신원식 신임 국방장관도 마찬가지다. 떠밀려 사과는 했지만 인성(人性)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정치인·관료들이 되새겨야 할 말이다.

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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