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 맞은 한일관계, 세계 '밸류체인 무역' 새 돌파구

  • 구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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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14 07:57  |  수정 2023-12-05 19:46  |  발행일 2023-11-14 제16면
[영남일보-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연구센터 공동 기획] 미증유의 'G0(제로)' 시대, 세계시장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9〉
지난 3월16일부터 이틀간 도쿄에서 한일 양국 정상이 만났다. 2011년 12월 마지막 정상회담 이후 무려 12년 만의 만남이었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백기투항' 또는 '굴욕외교'란 비난도 적지 않았지만,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수동적인 반응형 외교에서 벗어나 선제적으로 한일관계의 물꼬를 텄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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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장수현기자 jsh10623@yeongnam.com 〈게티이미지뱅크〉
◆美中, 선택의 시대 지났다

한일관계가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미증유의 'G0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한 한일 양국의 전략적 움직임과도 맞물려 있다.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강대국이 없어진 새로운 시대(G0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 아이디어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만 선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중을 모두 상대할 수 있는 전략적 폭이 넓어졌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택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우방국들에 미·중 간 디커플링 이슈가 양자택일의 문제로 비치는 이유는 새롭게 등장한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인공지능(AI),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양자 기술 등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첨단기술 분야만 따로 골라내 믿을 만한 동맹 및 우방들과만 공급망을 결성하겠다고 천명했다. 중국과 기술격차를 유지하면서 동맹과 우방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첨단기술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프렌드 쇼어링에 해당하는 첨단 분야를 제외한다면 굳이 중국 시장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美中양자택일 사라진 세계경제
우방국과만 공급망 결성 추세
韓日, 제3국서 연결 기회 늘어

日, 고령층이 가계금융 70%보유
1천조원 실버시장 韓 진출 아직
전자상거래는 서로의 거대시장


◆일본 반도체의 부활

이러한 점에서 일본은 매우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2022년 5월 일본 기시다 내각이 제정한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은 대내적 산업정책의 부활과 대외적 우방과의 협력이라는 두 개의 큰 축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 두 가지 정책 수단이 제대로 결합한 사례가 현재 일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부활 프로젝트이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산업 부활 시도는 칩4 동맹 등을 통해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이 대중견제의 수위를 높여가면서도 대중 수출액이 최근 3년간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전기·전자 관련 수출품이 호조세를 이어가고 있다. 국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본은 미국과 첨단산업 공급망을 구축하는 한편, 전통산업 분야에서는 여전히 중국 시장을 포기하지 않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한일 관계 개선이 주는 기회요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우리에게 몇 가지 경제적 기회요인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지금이 '상품무역의 시대'가 아니라 '글로벌 밸류 체인(Global Value Chain) 무역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GVC는 공정단위를 세분화해서 전 세계적인 분업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동안 한일 기업 모두 제조업의 생산거점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이전하는 직접투자를 늘려 왔다. 이러한 GVC의 재편을 통해 한일 양국이 직접 교역하는 규모는 축소됐지만, 그만큼 제3국에서 한일 기업이 연결될 수 있는 여지는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G0 시대'의 GVC 무역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국제환경에 직면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은 환경, 인권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신뢰할 수 있는 GVC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신뢰할 수 있는 국가를 유지국이라고 부른다. 뜻을 함께하는 국가들과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인데, 현재 일본의 유지국 명단에 한국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만약 한일 양국이 앞으로 상호 신뢰를 회복한다면, 일본으로부터 반도체 소재, 제조 장치와 같이 다른 국가가 대체할 수 없는 첨단기술제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한일 양국 GVC 구축의 의미

한일 양국이 신뢰할 수 있는 GVC를 구축한다는 것은 디지털 무역, 탄소중립, 인권과 같은 신통상 이슈에서도 중견국으로서 협력 및 공동 대처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다자간 FTA에 해당하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나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인 경제동반자협정(EPA)을 통해 새로운 통상규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은 미중 사이에서 중견국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국제규범 제정에 앞장서고 있는데, 이는 이제 막 선진국으로 진입한 우리나라가 향후 참고할 수 있는 국제적 지위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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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잠재력 가진 일본시장

'G0 시대'에도 지역시장으로서 일본이라는 거대 소비지가 갖는 존재감은 지속될 것이다. <그림1>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인구는 2010년경 1억2천808만명으로 정점을 기록한 이후 계속해서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추계에 따르면 2048년을 전후로 인구 1억명선이 붕괴하고 그중 40%를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차지하게 된다.

소비시장 측면에서 1억이라는 인구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이며, 현재 30%에 육박하는 고령인구는 우리에게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한다. 일본의 실버산업 시장규모는 1천조원(100조 엔)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천문학적인 시장규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기업이 일본에 진출한 사례는 거의 없다. 60대 이상의 고령층이 일본 가계 금융자산의 7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일본의 실버시장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수겸장의 자세 필요

이창민교수
이창민한국외국어대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한국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도 매우 긍정적인 편이다. 반일과 혐한 분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2020년에도 일본 넷플릭스 화제작 톱10 중 절반 이상을 한국 드라마가 차지했고,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상적으로 한국 음식과 K-pop, 웹툰을 즐긴다. 한국이 보유한 풍부한 문화 콘텐츠를 생각해볼 때 서비스 무역의 확대는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일본은 협력대상이면서 동시에 경쟁대상이기도 하다. 일본은 물론 중국, 심지어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산업과 품목에 따라서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는 전략적 분리 대응이 필요하다.

글=이창민 한국외국어대학교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정리=구경모기자 chosim3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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