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귀화 외국인의 벼슬

  • 이창호
  • |
  • 입력 2023-10-30 07:01  |  수정 2023-10-30 07:02  |  발행일 2023-10-30 제23면

조선시대 때도 외국인이 귀화한 사례는 꽤 있었다. 전쟁통에 들어와 눌러앉은 여진인과 왜인이 많았다.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전공(戰功)을 세운 이들은 벼슬을 얻었다. 인조 때 박연이라는 우리 이름을 가진 외국인이 있었다. 1627년 조선 해역에서 표류했다가 귀화한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다. 첫 벽안(碧眼)의 귀화자였다. 조정(朝廷)은 그의 손재주를 알아보고 훈련도감 내 한 직책을 맡겼다. 그는 조선에서 살 팔자라거니 여겼다. 딴 생각하지 않고 대포·조총 등 무기 개발에 앞장섰다. 무과에 합격한 뒤 조선 여인과 혼인해 자식도 낳았다. 조선인이 됐지만 숨길 수 없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닌 향수병. 1653년 조선에 표류한 같은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의 통역을 도와주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했다. 하멜을 만날 때마다 고향 타령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박연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생을 마감했다. 앞서 임진왜란 땐 사야가 라는 왜장이 조선군에 투항한 뒤 귀화해 큰 전공을 세웠다. 귀화명은 널리 알려진 김충선이다. 선조는 그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종2품 벼슬을 제수했다. 그는 1642년 72세의 나이로 지금의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최근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 임명된 우리나라 특별귀화 1호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가 연일 화제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토종 한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첫 일성이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명언인 '마누라와 자식만 빼놓고 다 바꿔라'였다. 초심을 잃지 않고 정치개혁을 이끌어 주길 바란다.

이창호 논설위원

기자 이미지

이창호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