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캔버스·영상의 전설적 거장, 영화관서 만나다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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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28  |  수정 2023-12-28 07:46  |  발행일 2023-12-28 제16면
■ 스크린 뚫을 듯 생생한 예술가의 삶

칸딘스키보다 앞선 세계 첫 추상화가

20세기 첫 디지털 크리에이터 백남준

류이치 사카모토 마지막 고별 연주도

건반·캔버스·영상의 전설적 거장, 영화관서 만나다
"내가 죽은 후 20년 동안 내 작품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추상 예술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삶을 그린 '힐마 아프 클린트'.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국내외 예술가들의 불꽃 같은 생애를 그린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하고 있다. 예술에 진지하고, 독창적이었으며, 격정적이기까지 했던 그들의 삶이 가볍고 혼탁한 이 시대에 잔잔한 울림을 던지고 있다. 한 예술가의 세계가 또 다른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보다 차원 높은 세계로 진화하는 과정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예술가들이 일생에 걸쳐 일궈낸 음악과 그림 등이 화면 전체를 장식하면서 또 다른 즐거움이 되고 있다.

◆치유·위안 주는 류이치 사카모토

27일 개봉한 '류이치 사카모토:오퍼스'는 올해 초 세상을 떠난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가 삶을 마감하기에 앞서 전 세계 팬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인사와 같은 작품이다. 죽음을 앞둔 예술가의 모든 것을 마치 하루의 시간을 응축한 듯 흡입력 있게 집약했다.

병이 악화되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했다. 그는 평생 동안 발표한 곡 중에서 가장 애착을 가진 20곡을 선곡, 연주했다. 제작진은 그가 암 투병 중이던 2022년 9월8일부터 15일까지 8일 동안 촬영했다. 당시 그의 몸 상태를 봤을 때 기적처럼 진행됐다고 보인다. 촬영 당시 그의 몸 상태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호흡들과 피아노의 기계적 소리가 하나가 돼 생생한 연주현장을 느끼게 한다.

1978년 데뷔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팝과 클래식, 오페라, 테크노 등 전 장르에 걸쳐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특히 영화음악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는데, 베르나르도 베르톨로치, 페드로 알모도바르, 오시마 나 기사, 브라이언 드 팔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세계적 거장 감독들과 작업했다.

그는 생전에 예술로 인간 본연의 세계를 찾는 탐구자이면서 운동가로 활동했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을 찾는가 하면 일본 후쿠시마 지진 및 쓰나미, 원전 사고 피해자들을 지지했다. 또 9·11 테러 현장에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환경 보전 노력, 비핵화 및 세계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건반·캔버스·영상의 전설적 거장, 영화관서 만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작별인사를 그린 '류이치 사카모토:오퍼스'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첫 추상 예술가, 힐마 아프 클린트

현재 상영 중인 영화 '힐마 아프 클린트'는 "내가 죽은 후 20년 동안 내 작품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세계 최초의 추상 예술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삶을 스크린에 오롯이 옮겨 적은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된 2018년, 세계 미술계는 힐마 아프 클린트 열병을 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작품이 전시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회는 개관 이래 최다 관객 수인 60만명이 다녀갔다.

이후 런던 테이트 모던, 스톡홀름, 파리와 베를린 등 전 세계로 이어진 힐마 아프 클린트 바람은 점점 더 강도를 높여 나갔다. 관람객들은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그녀의 미술세계와 격정적 삶에 빠져 들었다.

1862년에 태어난 힐마 아프 클린트는 1906년에 자신의 추상 작업을 선보였다. 이는 기존에 최초로 알려졌던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업보다 5년여 앞선 것이다. 이 사실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활동한 지 100년이 지나 공개된 그녀의 1천500여 작품, 2만6천 노트는 전 세계 미술 애호가는 물론 일반인에게 오판되고 은폐되었던 그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하고 있다.

건반·캔버스·영상의 전설적 거장, 영화관서 만나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생애를 그린 영화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예술보다 더 예술, 백남준 삶

이달 초 개봉한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백남준의 생애를 다룬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작에만 5년을 투입한 영화는 한국계 어맨다 킴이 감독을, 배우 스티븐 연이 총괄 프로듀서와 내레이션을 맡아 화제다. 감독은 어린 시절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접한 뒤 잠재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백남준에 관한 호기심을 키웠다고 한다. 6년 전부터 백남준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영화작업에 착수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방대한 양의 백남준 아카이브와 푸티지를 모으고, 여기에 박서보,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앨런 긴즈버그 등 글로벌 아티스트들의 인터뷰까지 확보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예술가 백남준의 철저하고 확고한 예술관을 보여줘 인상적이다. 백남준은 모두가 자신의 채널을 갖는 현재를 예견한 20세기 최초의 디지털 크리에이터였다. 극중 백남준은 "이유 있는 실수가 이유 없는 성공보다 낫죠. 전 늘 아웃사이더였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새로움은 진실보다 더 중요해요. 새로움은 아름다움보다 중요해요. 전 예술을 만들지 않아요. 예술이 절 만들죠"라며 자신만의 어딘가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예술관을 피력한다.

백남준을 '수수께끼'라 칭하는 감독은 "백남준을 단순히 비디오 아티스트로 정의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패턴을 읽었고,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미래를 예견한 백남준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며 관객에 당부한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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