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나의 운동권 친구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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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19 07:01  |  수정 2024-02-21 17:46  |  발행일 2024-02-19 제22면
감방 간 대학 운동권 친구
천문·인문학까지 시야 넓혀
한동훈의 '운동권 카르텔론'
좌파의 우려먹기 예우 겨냥
운동권 청산? 소멸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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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대학 1학년때 우연찮게 들어간 동아리가 '갈무리'였는데 일종의 운동권 서클이었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클이 대충 그랬지만, 처음 읽고 토론한 책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었다. 이승만을 굉장히 뭉개고 좌파 운동가들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책이었는데, 난 이승만이 그렇게 폄훼할 인물인가 하고 반문했던 기억이 있다. '8억인과의 대화'도 접했는데 대략 중국 공산혁명에 대한 호의적 로망을 그렸다 할까.

30여 명의 학과 동기 중 진짜 데모하던 운동권 친구가 몇 있었다. 그중 A가 2학년 겨울방학에 같이 공부하자며 건넨 책이 생각난다. 일본 서적인데 친구는 원서를 그대로 읽었고, 난 번역본을 보는데 내용은 이렇다. 인류 발전사는 '원시공동체-농경사회-봉건사회-자본주의-공산주의'로 최종 귀결된다고 규정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래서 정당하고 필연적이다.

A는 그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이른바 '삐라'를 뿌리고 교정에 상주하던 경찰에 잡혀갔다. 1년여 감방에 있었다. 20대 초반에 감옥이라니.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련하다. 졸업 무렵인가 교정에 나타난 그는 '사면복권장'을 들고 왔다. 난 그날 '부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흘렀을까. 어느 날 동기회를 했는데, 그에게 근황을 물었다. 그는 '감정평가사'가 됐다고 했다. 신기했다. 왜 자본주의 최첨병 직업을 택했냐고 하니 "나도 먹고살아야지" 하고 응답한 기억이 난다. 모임을 하면 나는 그의 옆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는 천문학이나 인문학까지 굉장히 박식하다. 들을 것이 많다. 얼마 전 모임에서는 마지막까지 남았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린 그날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나를 중간인 역삼역에 내려줬다. 그는 모든 게 성숙해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한국의 운동권 정치인들을 '이 나라의 진짜 기득권 카르텔'이라며 선전포고를 했다. 총선 제1호 공약이다. 운동권 출신은 국민의힘에도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에 집중 포진해 있다. 160여 명의 민주당 의원 중 절반에 육박하는 70여 명이 운동권이다. 30대에 국회에 입성해 3선·5선의 다선의원도 수두룩하다. 국회 밖 외곽에 포진한 운동권 집단은 거대한 성전이 돼 있다.

1970년대까지 고전적 운동권은 '절차적 민주화'에 집중했지만, 이후 갈수록 좌파 마르크시즘적 원론에 심취하고 친북 요소까지 가미했다. 미 제국주의 식민지론, 제3세계 종속이론에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한 부류까지 등장했다.

운동권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종종 벽을 느낀다. 친구 A처럼 이념을 넘어 천문학이든 인문학이든 시야를 넓힌 흔적이 없다. 유통기한이 지난 이념의 화법을 21세기 오늘에 들이민다고 할까. 그 순간 난감함이 엄습한다. 한동훈의 지적처럼 사골 우려먹는 전관예우를 떠올린다. 카를 포퍼나 막스 베버 책을 보면 한국 좌파 운동권의 지향점이 전체주의 성향에 접목됐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생업에 몰두하는 많은 국민들은 사실 그런 배경을 알기는 어렵다. 이승만 평전 영화가 이 시점에서 새삼 주목받는 배경일 게다.

운동권은 청산될 수 있는 것일까? 난 청산이라기보다는 소멸이라 말하고 싶다. 한국의 치열했던 거리의 정치, 데모의 숱한 현장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일본의 적군파도, 프랑스의 학생운동도, 이란 총학생회의 인질극도 다 한때였다. 대한민국도 이제 그들을 떠나보낼 시대가 온 것 같다. 물리적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정치집단은 없다. 지적 지평선을 넓힌 성숙한, 진짜 운동권 친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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