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부자들이 내는 의료보험

  • 박재일
  • |
  • 입력 2024-03-18  |  수정 2024-03-25 18:47  |  발행일 2024-03-18 제22면
한국의 눈부신 의료제도

부자 뒷문 열린 건강보험

10억대 연봉, 1억원 부담

지금 도입했다면 난장판

복지, 부자 존중을 전제로

[박재일 칼럼] 부자들이 내는 의료보험
논설실장

미국 등지의 교포들이 한국을 방문해 병원을 찾는다는 건 이제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그만큼 흔해졌다. 이유는 의료보험 적용을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병원비가 싸기 때문이다. 몇 달씩 묵으면서 친지도 만나고 성형이나 임플란트 같은 의료서비스를 받는다. 비행기 표가 빠진다는 소리도 있다. 중국 동포나 외국인 근로자는 취업하면 한국의 의료보험 혜택까지 받는다. 그들은 첨단 시설에 손재주 좋은 한국 의사들, 값싼 비용에 놀란다.

미국의 경우 과중한 의료비 탓에 중산층이 파산한다는 게 사회적 문제가 됐다. 암 수술에 몇십만 달러, 억대의 치료비가 소요돼 파산 중산층이 연 50만 가구를 넘었다는 통계도 있다. 물론 한국의 중산층도 의료비로 파산하는 경우가 OECD 기준으로 보면 그에 못지않다는 수치도 있지만, 총체적 경험으로 보면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눈부시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미국은 '오바마 케어'에도 불구하고, 의료비를 대략 사보험에 의존한다. 좋은 직장에 다니면 회사가 비싼 보험료를 대 주지만 막상 아프면 실직하고, 정작 필요한 그 순간에는 스스로 보험료를 내야 하니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돈을 아끼려고 보험을 들지 않은 상황에서 만일 중병에 걸린다면 수억 원의 병원비가 청구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는 빛을 발한다.

언젠가 산책하다 대구은행 네거리에서 병원 수를 헤아려 봤는데 수십 개가 넘어 카운팅을 포기했다. 우린 대도시의 경우 웬만한 빌딩마다 병원이 없는 곳이 없다. 어떤 곳은 종합병원처럼 건물 전체가 의료화됐다. 응급실 뺑뺑이 논란도 있지만 밀집한 병원 탓에 다른 나라에 비해 병원 드나들기가 쉽다. 흔한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면 몇천 원을 내면 되고, 약국도 마찬가지다. 선진국 어딜 가도 이런 시스템은 잘 보지 못한다. 그 배경에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가 있다.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한국인은 부자들 덕에 의료비를 대폭 경감받는다. 매달 내는 건강보험료는 기본적으로 수입의 7.09%인데 이게 뒷문이 거의 열려 있다. 보통의 월급쟁이라면 회사 부담 절반을 제외하고 월 10만~30만원 정도에 그치지만 부자들은 다르다. 월 최대 보험료 상한선은 848만원, 그러니까 이 금액이 될 때까지는 7.09%를 뗀다. 월 1억2천만원을 버는 사람들이다. 연간 1억원 가까이 건강보험료를 납부한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평등주의 요소가 강한 이 정책을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시작해 보수정권이 구축했다는 점은 한편 숙연하다. 아마 지금 이걸 도입한다면 나라가 완전 쑥대밭이 될 것이다. 부자들은 최상의 대우를 약속하는 보험회사로 달려갈 게다. 한국 의료보험의 저력을 생각하면 의사 수 늘리기로 정부와 의사집단이 팽팽히 대치하는 현 상황은 어쩌면 사소한 논쟁이다.

영화 기생충의 '부자들은 착하다'는 대사가 한때 회자됐다. 돈이 있으니 예의와 염치가 생기고 한편 착하다는 논리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착한 것을 떠나 좋은 제도, 좋은 복지는 우리가 앞뒤 생각 없이 떠들기만 하면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도로와 고속철을 깔고, 기초연금에 복지관과 도서관을 운영하고, 교사와 군인 월급을 주는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부담이 있어야 가능하다. 어떤 철모르는 정치인들은 종종 그 돈이 마치 화수분처럼 쏟아지듯 '퍼주기'를 떠들어댄다. 인간 사회가 복지국가를 구현하길 원한다면, 그건 부자들에게 존경은 몰라도 존중해야 할 시대가 점점 다가온다는 뜻도 된다.논설실장

기자 이미지

박재일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