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한중일·한일중의 슬기로운 표기법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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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6-06  |  수정 2024-06-06 07:00  |  발행일 2024-06-06 제18면
尹 정부는 한일중·미북 선호

부르기 편한 건 한중일·북미

용어·호칭은 입에 익숙해야

연고전, 연고대도 같은 이치

순서만 따지면 꼰대적 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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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학창 시절 워낙 명징하게 각인했던 터라 조선왕 27명의 묘호가 아직도 입에서 술술 나온다. '기억은 시간에 반비례한다'는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이론'도 이럴 땐 예외다. 마음 같아서야 현군 세종과 정조를 맨 앞에 내세우고 패륜군주 연산군·인조를 뒤로 돌리고 싶지만 '태정태세문단세'는 단지 조선왕의 즉위 순서일 뿐이다. 또 '김·이·박'은 인구 많은 성씨 순이니 함부로 바꿀 수 없다.

'한중일'과 '북미'는 다르다. 순서를 임의로 바꿀 수 있다. 그래도 역대 정부는 대체로 한중일, 북미로 불렀다. 윤석열 정부의 공식 자료는 한일중, 미북 표기가 대세다. 지난달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 땐 꽤 많은 언론이 한일중으로 썼다. 한데 우리가 부르기엔 한일중, 미북보다 한중일, 북미라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편하다. 일본은 삼국을 거론할 때 '일중한'이라 한다.

무릇 용어나 호칭은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 굳이 연음현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레이건노믹스보단 레이거노믹스라 말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은 레이거노믹스로 표준화했다. 페로니즘, 바이드노믹스도 마찬가지다. 국민통합위원회가 탈북민 대체용어로 제시한 북배경주민은 어떤가. 북배경주민? 부르기 불편하고 어색하며 뜻이 금방 와닿지도 않는다. 정작 중요한 건 탈북민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우리 국민으로 동화하는 것이다. 괜한 호칭에 집착할 일이 아니다.

호칭에 딴죽을 거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김건희 여사 특검'보다 그냥 '김건희 특검'이라고 하는 게 훨씬 편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선거방송심의위원회는 '여사'를 생략한 방송사에 행정지도를 내리며 시비를 걸었다. '여사'를 빼면 불경죄? 아프리카 같은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블랙 코미디다. '여사'를 넣지 않아도 온 세상이 영부인이란 걸 다 아는데. 이런 논리면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을 부를 때도 '선수'나 '님'을 꼭 붙여야 하지 않겠나.

윤석열 정부는 유독 순서에 집착한다. 국민연금의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인구변화와 기대여명, 경제성장률에 따른 자동조정장치에다 기초연금 및 직역연금과의 통합까지 들여다봐야 하는 구조개혁은 모수개혁보다 더 난삽하고 더 저항이 많은 초대형 공사다.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 하니 21대 국회에서 모수개혁을 먼저 처리하는 게 순리였다. 이재명의 정략이어서 거부했다면 '용렬한 여당'의 모습을 시전한 것이다.

중요성은 부르는 순서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다. 다들 대구경북으로 쓰지만 그렇다고 경북이 경시되진 않는다. 오히려 경북의 1인당 GRDP가 대구보다 앞서고 인구도 경북이 살짝 더 많다. 북미라고 한들 오물 풍선 따위나 날려 보내는 저열한 북한을 미국보다 중시할 국민은 없다. 의미 없이 부르기 편해서 북미라고 한다. 고연전, 고연대가 아니라 연고전, 연고대로 우리 입에 익숙해졌다. '짜장면'이 표준어가 된 것도 같은 이치다.

순서만 따진다면 그게 꼰대적 발상이다. 노래방에 가서도 계급 순서대로 노래 부르는 아류다. 박근혜 정부는 안전을 강조하겠다며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칭했다. 그러고 얼마 뒤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허망한 후과다. 한일중, 미북을 고집하는 건 좀스럽고 찌질하다. 그냥 부르기 편한 대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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