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초등 의대반이 염려되는 이유

  • 이창호
  • |
  • 입력 2024-08-05  |  수정 2024-08-05 07:01  |  발행일 2024-08-05 제23면

[월요칼럼] 초등 의대반이 염려되는 이유
이창호 논설위원

"우리나라에선 말이야, 생명에 대한 사명감이 있거나 없거나 시험만 잘 치면 의사가 될 수 있어. 그러니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시험을 잘 봐서 등수를 올리도록 해. 아는 것이 실력이 아니라 매겨진 등수가 진짜 실력이니까" 10년도 더 됐나, '여왕의 교실'이라는 TV 드라마에 나온 대사의 한 토막이다. 까칠한 초등교사 마여진(고현정 분)이 수업 시간 어린 제자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꼰 워딩이다. 불현듯 이 대사가 떠오른 것은 작금 사교육 시장에서 논란 중인 '초등 의대반' 문제를 보면서다.

초등 의대반은 훗날 의사가 되려는 초등생에게 중·고교 과목을 선행해 가르치는 사설 학원 강좌를 일컫는다. "부모들이 제정신이야, 초등생 때부터 뭔 의사를 시키려고 그래" 요즘 이런 말 하면 세상 물정 모른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초등 의대반 같은 '초(超)조기 선행학습'의 근거는 다름 아닌 그물론(論)이다. 일찍부터 그물(선행학습)을 촘촘히 짜놓으면 그만큼 많은 물고기(의대·치대·약대·한의대 등)를 잡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의대 증원 확정 이후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한 선행학습 열풍이 더 거세졌다. 서울 대치동만이 아니다. 대구를 비롯한 지방에서도 바람이 분다. 이러니 우리나라 연간 사교육비가 27조원을 웃돌고도 남는가 보다.

초등 의대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각에선 '아동 학대'라고도 비판한다. 하지만 아이 스스로 원하거나 부모 뜻에 공감해서 하는 경우도 있으니 싸잡아 얘기할 순 없다. 라디오 토론 프로에서 들은 얘긴데, 의대 진학은 평생 쓸 수 있는 좋은 물건 하나를 장만하는 것이라고. 모든 게 불확실한 시대, 안정적 삶을 보장해 줄 의대 입시를 시키려는 부모 마음을 알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염려가 든다. 부모의 과욕과 기대 때문에 억지로 선행학습의 길로 내몰리는 아이들은 어쩔 텐가. 초등 때부터 선행학습에 매몰될 경우 정작 집중적 성과를 내야 할 고교 때 기진맥진한다. 거의가 그렇다. 이러면 시쳇말로 죽도 밥도 안된다. 초등 의대반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개연성이 큰 이유다.

오래 전, 성적 우수생들은 공대와 의대에 골고루 들어갔다. 성적이 차고 넘쳐도 메스 쥐는 게 싫어 의대를 가지 않은 이도 많았다. 지금은 어떤가. '알아주는 공대'에 들어가고도 마음은 의대에 있는 학생들이 넘쳐난다. 적성은 둘째 문제다. 재수·삼수를 해서라도 의대생이 되려 한다. 인재들 모두가 의대에 목을 맨다?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에선 지금 물리학과가 상종가다. 물리학의 도움 없인 AI 기술 개발이 안된다고 한다. 빅테크 기업에선 '물리학 전공자 모시기' 전쟁 중이다. 우리도 전국 수석이 서울대 물리학과를 가는 게 코스인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 게 정상이다.

의사는 존경받고 많은 연봉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숭고하고 정교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 제일주의'가 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교도소에 갈 만큼 위험을 무릅쓸 중요한 환자는 없다" 얼마 전 한 의협 간부가 한 얘기다. 모두(冒頭)의 시니컬한 드라마 대사가 다시 떠오른다. 의사를 꿈꾸는 초등생에게 가르쳐야 할 건 고2 과정의 미적분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중심과 책임감이 먼저 아닐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초등 의대반 과몰입'은 안 된다.

이창호 논설위원

기자 이미지

이창호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이미지 생성 AI '미드저니' 가이드 조남경

더보기 >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