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경상북도 사찰의 독립운동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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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8-07  |  수정 2024-08-07 07:02  |  발행일 2024-08-07 제27면

[영남시론] 경상북도 사찰의 독립운동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가야산 해인사, 황악산 직지사, 팔공산 부인사·동화사 등 영남지역 사찰은 호국불교의 산실이다. 고려시대 대몽항쟁기 부인사 초조대장경과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불교에 의탁해 고려를 지키려는 구국 혼의 발현이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승려들의 애국정신은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직지사에서 출가한 임진왜란 승병장 사명대사는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다가 동화사에 영남 승군 본부인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을 설치하고 왜적에 맞서 승군을 지휘했다. 전쟁이 끝난 뒤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백성 포로 3천여 명을 구출해냈다. 대일항쟁기에도 이러한 전통은 계속됐다. 1915년 대구 앞산 안일사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전신 조선국권회복단이 창단된 건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 때도 만해·백용성·백초월 선사를 비롯해 중앙학림 학승과 통도사, 동화사, 해인사, 직지사 등 수많은 지방학림 학승들이 독립 만세운동에 동참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기독교계와 학생이 중심이 된 대구 3·8서문장 만세운동에 이어 2천여 명이 봉기한 대구 최대 규모의 3·30동문장(현 염매시장) 만세운동은 동화사 지방학림 스님들이 주도했다. 이들 스님 중 10명이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후에도 스님들은 국내외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나섰고, 또 다른 일부는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거나 대한독립단에 입단해 독립전쟁에 몸을 던졌다.

김천 직지사, 구미 도리사, 문경 김룡사 등지 학승들도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1919년 3월31일 해인사에서 스님 2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의 주역 중 김봉률 스님과 김경환 스님은 각각 직지사와 도리사에서 출가했다. 김봉률 스님은 만세운동 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할 정도로 독립 의지가 강했다. 도리사 출신 김경환 스님은 선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일경에 잡혀 옥살이를 하고 이후 만주로 가서 대한독립단에 입단해 만주의 본계현을 책임졌다. 이후 귀국해 독립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돼 또다시 구속됐다.

문경 김룡사에서도 1919년 4월13일 송인수, 성도환 스님 등이 만세운동을 결행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천과 성주에서도 청암사를 중심으로 김도운, 이봉정, 남성엽 스님이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곳 출신 스님들의 행적은 널리 현창되지 않았다. 김봉률 스님은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으며 동화사 학승 6명은 2020년이 돼서야 서훈을 받았다. 특히 김경환 스님은 일제의 재판기록이 있음에도 아직 서훈받지 못했다. 집도 가족도 절도 버린 채 나라를 위해 투신한 결과치곤 우리가 너무 무심했다.

신라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고찰이다. 도리사 태조선원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방인데, 빛바랜 현판 글씨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다. 위창은 독립운동가이지만 서예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는 6·25전쟁 때 대구에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위창이 도리사에 들러 태조선원 현판을 쓴 연유는 무엇일까. 제79주년 광복절을 닷새 앞둔 10일 오후 2시 영남일보와 도리사가 설선당에서 공동으로 '경상북도 사찰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이날, 이곳에서 위창이 도리사 현판 글씨를 쓴 경위가 밝혀지길 기대한다.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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