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경주에 가거든'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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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8-19  |  수정 2024-08-20 18:50  |  발행일 2024-08-19 제22면
평일 오후의 경주 황리단길

확장된 상권, 인파로 가득

살짝 쓸쓸해진 보문단지

천년 고도 문명의 재발견

비밀의 경주, APEC으로

[박재일 칼럼] 경주에 가거든
박재일 논설실장

경주 황리단길은 평일 한낮인데도 북적거렸다. 연인들, 신혼부부, 아기 업은 사내, 한껏 몸을 노출한 외국인, 그들의 눈빛은 30℃를 훌쩍 넘는 태양 빛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황리단길, 정확히 말해 경주 황남동 일대는 불과 몇 년 만에 엄청 확장됐다. 오랜 기와집들은 개조돼 카페, 기념품 가게, 식당으로 속속 변신했다. 근년 들어 만들어진 신식 한옥조차 신라 천년의 향기를 머금은 듯하다. 거리의 전기줄은 모두 땅속에 묻어,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하늘과 바로 마주한다. 함부로 집을 못 짓는 규제의 고통은 이제사 빛나고 있다. 문득 내년에 경주에서 개최되는 APEC(아시아 태평양)정상회담의 각국 수뇌들을 이곳으로 먼저 안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딸 아이가 검색한 카페에서 아이스 커피 한잔으로 더위를 식히니 또 걷고 싶다. 좁은 골목길을 탈출하자 거대한 왕릉이 시야를 압도한다. 대릉원(大陵苑)이다. 볼 때마다 감탄한다. 황리단길은 아마 대릉원과 인접하지 않았다면 그냥 소란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장쾌하게 뻗은 소나무와 느티나무는 천년 왕국의 대왕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하다. 외국인 단체 관광객을 향한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열정적이다. 이름이 밝혀진 왕릉, 그렇지 못한 총(塚), '하늘을 나는 말(천마도)'을 소개한 해설사는 대릉원 극강의 포토 존으로 그들을 안내한다.

일은 겹친다고 하던가. 며칠 뒤 세미나 참석차 또 경주를 찾게 됐다. 한국경영학회 주최 한 세션인 '지방시대' 토론회가 보문단지 하이코에서 열렸다. 골프장과 호수로 둘러싸인 보문단지는 늘 매력적인데 예전같지는 않다. 현대, 대우 산하 대기업들이 운영하던 호텔 소유권은 모두 넘어갔다. 보문호도 덩달아 살짝 쓸쓸하다. 리조트의 명성만 남았다고 할까. 황리단길은 뜨는데 보문호가 쓸쓸한 이유는? 아마 그건 문명의 위대함 때문일 게다. 천년 고도 경주시내는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역사유적지다. '인공호수 리조트'와는 다른 차원이다.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로 곧장 가지 않고 경주시내 쪽으로 차를 돌렸다.

그날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 나도 잘 모르겠다. 1천300년 전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잠시 둘러보고 오솔길 같은 아스팔트로 내려가는데 한눈에 봐도 부부인 듯한 중년의 백인 남녀가 자전거를 타고 유유자적 달려오던 그 풍경이다. 그 뒷 배경은 석양을 맞은 월성 역사유적지구에 놓인 월정교였다. 마주치는 순간, 그들도 지금 생애 최고의 순간을 관통하고 있다고 느끼는 듯해 보였다. 경주박물관 아래 들판은 고흐의 유화처럼 일렁거렸고, 천년 왕토의 세월은 푸른 공기와 버무려졌다.

관람 종료로 문 닫힌 오릉(五陵) 앞에 섰다. 나의 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곳을 빼먹을 수는 없다. 남쪽에 큰 산이 눈에 들어온다. 경주 남산이다. 모든 바위 하나, 모든 돌 하나가 다 유물이라는 그 산이다. 경주는 거대한 노천 박물관이다. 발굴과 복원 작업이 수십 년째 진행되고 있다. 못살던 시절 팽개쳤던 유적지가 이제 땅위로 올라오고 있다. 개발시대 경주의 시가지가 확장되지 않은 행운도 있다. 경주와 로마는 지구상 딱 2개 도시, 천년 수도라고 했던가. 오래전 들른 로마의 '포로 로마노'도 그랬다. 2천년 세월의 켜켜이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땅위로 올라왔다. 윤석열 정부가 별로 잘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경주 APEC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다. 경주는 여전히 비밀스럽다. 글은 쓰면서도 나는 경주를 모른다고 실토해야 한다. 춘원 이광수가 썼던가. '경주에 가거든'을 도서관에 가서 찾아 읽어보고, 가을이 오면 다시 경주로 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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