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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 논설실장 |
8년 전 2016년 미(美) 대선의 트럼프 당선은 하나의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3자적 관찰자 입장인 한국은 특히 더 했다. 묘한 반(反)트럼프 기류가 있었다 할까. 2024년 47대 미 대선도 미국 밖에서는 은근히 도널드 트럼프를 디스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물론 러시아나 북한은 아닌 모양이다.
지난 여름, 미국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 왔길래 만났다. 민주당 성향이고 미 시민권자이자, 정치학을 전공한 이 친구는 어쩌면 트럼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백인 주류사회, 종교계 특히 복음주의 세력의 전폭적 지지, 낙태를 둘러싼 공방 등이 그 배경이라고 했다. 또 다른 미국 교포는 아예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했다. 세금도 깎아주고 재임 시절 경제가 좋았다나.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트럼프가 또 대통령을…
트럼프의 한국 관련 발언은 흥미롭다. 대표적인게 방위비다. "한국은 부자나라다. 방위비 분담금을 10배로 올리겠다". 일상의 거래에서 한꺼번에 10배를 올린다는 게 가능한가. 근데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한국은 부자나라' 라고 전제하고 있다. 웬지 붕 뜬다 할까. 부동산 거부로 협상의 달인이라는 트럼프의 성향이 떠오른다.
트럼프의 허풍과 거짓말은 이제 뉴스가 아니다. 2020년 자신의 대선 패배는 부정선거로 조작된 때문이라 선동했다.(아닌 것으로 법원판결) 코로나는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호언했다. 심지어 이민자들이 반려동물을 잡아먹는다고 자극한다. 아니면 말고식의 화법을 쓰고, 불리하면 그건 '가짜뉴스(Fake News)'라고 둘러댄다. 그의 거짓말에 내성이 생기는 걸까. 어떤 이들은 트럼프의 거짓말에는 스토리텔링이 있고, 정치적 함의가 있기에 그냥 넘어간다고 분석한다.
미국 정치는 전반적으로 묘한 구석이 있다. 리버럴(Liberal)한 듯 하면서도 고루한, 고전적 측면이 병립한다. 그리스천 종교가 기본을 깔고 있다. 낙태(Abortion) 논쟁이 종교와 얽히면서 미 대선의 단골 이슈다. 하루가 멀다하고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지만, 수정헌법 정신을 대며 고칠 줄을 모른다. 트럼프 지지층의 핵심은 미 대륙 중앙의 넓은 들판에 산재한 순박한 백인들이다. 2021년 1월6일 트럼프 패배에 불복한 백인 중심의 폭도들이 의사당에 난입한 사건은 전세계에 미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알렸다. 한국은 국회의원들까리 자해 행위를 벌이는 경우는 있어도 시민들이 의사당에 난입해 죽은 적은 없다. 하버드 대학의 레비츠키와 지블랫 교수는 트럼프 때문에 '민주주의는 어떻게 죽어가는가( How Democracies Die)'란 저서까지 펴냈다.
오래전, 2004년 미국 연수시절 미 대선을 간접 취재한 적이 있다. 조시 부시와 존 캐리가 맞붙었다. 오바마가 대중 연설로 뜬 시기이기도 하다. 그때도 이른바 경합주 (州),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의 하나가 펜실베이니아였다. 동서로 500㎞쯤 되는 뉴욕행 80번 고속도로를 달리면 애팔래치아 산맥 아래 가을 단풍의 아름다운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번에도 이곳을 이기는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펜실베니아의 풍광을 존중하듯이, '선거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불미(不美)'는 상상 불가였다. 지금은 현실이 됐다. 2024년 11월5일 선거 결과는 어쩌면 일주일 아니면 한달 이상 유보될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민주주의의 본산 미국, 삼권분립을 세계 최초로 실천한 나라, 팍스 아메리카의 주인, 세계 경찰, 로마 이후 최강의 나라 미국은 어디로 가는가? 행여 평범한 나라로 돌아가는 역사의 전조인가? 그런 생각들이 자꾸 떠오른다.
논설실장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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